雜家의 매력

경찰, 곰바우에서 영웅으로 2009/09/04

딸기21 2021. 1. 8. 23:24

“경찰에 대해서 뭘 기대할 수 있있는가? 저급한 생각만 하는 사람들을 매일 대하면서 그 자신도 부지불식간 도덕성에 해를 입는 그들을? 일단 의심만 들면 무조건 체포하고 보는 그들을?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성급한 행동을 미화하려고 금지 수단을 써서 억지로 자백을 받아내는 그들을?”

이명박 정권 아래 보이는 경찰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거나, 한국 경찰에 대한 시민들의 부정적 시각을 드러낸 말로  섣불리 오해해선 안됩니다. 저 말은 200년전, 그러니까 1800년대초, 프로이센의 법무장관 키르히아이젠이 한 말입니다. 그러나 세월과 나라를 초월해 지금에도 충분히 나올 듯한 비판입니다.

 

 

경찰처럼 힘든 직업도 사실 없습니다. 가장 비슷해 보이는 군대와 비교하는 말이 떠오릅니다. 군은 전투를 벌이다 붙잡히기도 하고 항복을 하기도 합니다. 항복하면 제네바협정에 따라 포로 대우를 받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범죄와 싸우기 때문에 절대 항복해선 안됩니다. 게다가 군은 어쩌다 전투를 벌이지만 경찰은 늘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경찰처럼 욕먹는 직업도 없습니다. 키르히아이젠이 지적한 바로 저런 속성 때문이겠죠. 경찰을 좋아하는 나라는 사실상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대중문화속에선 좀 달라집니다. 경찰은 가장 문학적인 직업이자, 현대 대중문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직업입니다. 추리 범죄 스릴러 문학이 생기면서 경찰은 이 장르의 영원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한 직업이 문학에서 이렇게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예가 또 있던가요?

그러나 추리 문학에서 경찰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추리란 장르의 역사는 경찰이란 직종이 초반의 무시와 조롱을 딛고 스타로 변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 추리소설은 경찰을 조롱하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본격 추리소설 최초의 작가로 불리는 프랑스의 에밀 가보리오는 <르루주 사건>에서 범인을 밝혀내는 주인공으로 경찰이 아니라 타바레 신부를 내세웁니다. 인기 없는 경찰이 주인공 탐정의 뛰어난 추리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오히려 더 무능하게 나오는 이런 설정은 거의 모든 추리 초기 작품에서 공통적이었습니다. 중앙집권국가여서 경찰력이 정권의 중요한 통치수단이었던 프랑스는 특히 경찰에 대한 반감이 컷고, 아예 경찰을 가지고 노는 도둑이 주인공 스타인 <괴도 뤼팽>까지 나왔습니다.

미국 최고의 연기자 가문의 시조, 존 배리모어의 이름이 보이는군요. 이 사람의 아들은 존 드류 배리모어, 이 아들의 딸은 드류 배리모어. 3대 연기자 집안입니다.


영국은 어떨까요? 경찰에게 바비라는 애칭을 붙인 점에서 경찰과 대중의 관계가 다른 나라와 좀 다르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남들보다 경찰을 덜 싫어하는 편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정말 영국인들이 경찰을 사랑한다면 셜록 홈즈가 주인공이 아니라 경찰이었을테니까 말입니다. 일본 범죄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의 주인공도 경찰이 아닌 탐정 아케치 고고로였습니다.
 
이런 경찰 놀리기 전통은 경찰이 고문에서 증거 수집 위주로 수사 방식이 바뀌면서 경찰에 대한 인식이 훨씬 나아진 20세기에도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미국에서 엄청나게 인기였던 드라마,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명탐정 변호사 이야기인 `페리 메이슨 시리즈'입니다. 추리 장르에서 경찰을 가장 처참하게 깔아뭉갠 작품 되겠습니다.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 <페리 메이슨>. 경찰을 무지하게 놀려 먹은 드라마로 꼽힌다.


작가 얼 스탠리 가드너가 만들어낸 주인공 페리 메이슨은 형사 전문 변호사로, 유능한 여 비서 델라 스트리트, 그리고 탐정 폴 드레이크와 팀으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매번 자기에게 변호를 요청한 의뢰인이 죄가 없는데 경찰과 검사가 잡아넣었다는 것을 밝혀냅니다. 페리 메이슨의 맞수 LAPD의 트래그 경감과 해밀튼 검사는 매번 바보가 되어 농락 당합니다.
 
문제는 이 시리즈의 작가 얼 스탠리 가드너가 지나치게 다작형 작가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제조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소설을 쓴 그는 페리 메이슨 시리즈를 무려 85편이나 썼습니다. 이 많은 작품들이 레이몬드 버를 내세운 드라마로 만들어져 더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미국 경찰에겐 방영 기간 내내 악몽이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이 시리즈가 엘에이시경(LAPD)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풍조를 만들어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니까요. 실제 OJ 심슨 사건 때 많은 이들이 엘에이 경찰의 수사 결과를 믿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이 페리 메이슨 시리즈로 굳어진 경찰의 이미지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렇게 추리 스릴러 장르 속에서 수모를 당하는 경찰들의 이미지는 이후 조금씩 나아집니다. 한편에선 꾸준히 경찰을 놀려먹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경찰이 비로소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기존 주인공이었던 탐정들의 현실성이 너무나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미스터리를 위해 자연스럽게 수사 주체인 경찰들을 주인공으로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강력 사건이 여과없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범죄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은 더욱 커져갑니다. 자연스럽게 범죄를 해결하는 경찰은 대중 문화속에서 중요해졌습니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는 이런 경향을 대표합니다. 팀워크를 바탕으로 집요하게 범죄자를 쫓는 경찰 이야기 시리즈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경찰 혐오자> 등은 추리 문학의 고전으로 꼽힙니다. 듀엣 작가 엘러리 퀸도 자신들이 만들어낸 분신이자 주인공 명탐정 엘러리 퀸에게 경찰 정신의 화신과도 같은 파트너인 아버지 퀸 경감을 붙여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경찰 영웅 범죄물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드라그넷>이 나옵니다.
 
국내에는 댄 아크로이드와 톰 행크스가 주연한 1987년작 영화로 알려진 <드라그넷>은 미국판 수사반장 같은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미국 경찰의 위상을 가장 확실하게 올려줬던 대중문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장수 시리즈 드라마 <드라그넷>. 미국에서 경찰 홍보대사 역할을 했다.


드라그넷은 두 경찰이 주인공인 버디 무비의 고전입니다.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경찰, 그리고 재치있고 요령좋은 경찰이 콤비를 이뤄 범죄를 소탕합니다. 이 시리즈는 장수 드라마로 인기를 이어갔는데, 시청자들보다 더 좋아했던 사람들은 바로 엘에이 경찰들이었습니다. 주인공 조 프라이데이 역할을 작가이자 제작자인 잭 웹이 1982년 세상을 떠났을 때 LAPD는 조기를 내걸었고, 드라마속에서 그가썼던 경찰번호 714번을 영구 결번하기로 결정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페리 메이슨>에게 처절하게 두들겨 맞았던 엘에이경찰은 이 <드라그넷>으로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던 셈입니다.
 
이 드라마는 아주 많은 시리즈들의 법칙을 선보였습니다.


우선, 수사팀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은 절대 9명을 넘지 않는 법칙입니다. 평균 5명 정도가 적당하다는 것을 보여줬고, 이는 이후 많은 수사물에 적영됐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에는 같은 멜로디와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드라그넷은 항상 “이곳은 도시다.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나는 항상 경찰수첩을 가지고 다닌다.”로 시작했고, 끝날 때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본 이야기는 실화이다. 다만 무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는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이런 구성, 익숙하시죠?

 

시에스아이 라스베이거스.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드라그넷의 후배들은 지금 텔레비전을 접수했습니다. 특히 미국 드라마들은 범죄수사물 만들기에 혈안이 된 듯해, 지금 미드들은 경찰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성범죄전담반> <크리미널 마인드> <넘버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찰 주인공 수사 시리즈가 시즌을 거듭하며 쏟아져 나옵니다. 미국 경찰이 한 편에서 로드니 킹을 두들겨 패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지만, 적어도 대중문화속에서는 우리가 만나고 싶은 경찰, 친하고 지내고 싶은 멋진 경찰, 멋진 수사관들이 넘쳐납니다.

 

<성범죄전담반>

 

자, 그러면 한국 대중문화속 한국 경찰은 어떤 모습과 위상을 보여주나요?

안타깝게도 완벽하게 이런 흐름과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대중문화속 경찰, 그리고 실제 경찰 모두 역대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국 추리장르가 부진에 빠지면서 명경찰 캐릭터는 완전 실종상태입니다. 그나마 70~80년대 한국 대중문화속에는 텔레비전에는 드라마 <수사반장>이 있었고, 한국 추리소설에는 김성종의 오병호 형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국 추리문학 자체가 존재감이 없어 경찰 캐릭터가 사라졌습니다. 대신 한국 영화에서 스릴러가 약진했지만 스크린 속 한국 경찰은 여전히 조롱대상일뿐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머더>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장르문학이 순수문학보다 오히려 더 사회를 잘 반영하는 속성으로 볼 때 한국 경찰이 외국처럼 대중문화속에서나마 사랑받기는 실로 어려워보입니다. 이번 정권 출범 이후 촛불 정국과 서거 정국에서 경찰은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만큼 악역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아무리 매력적인 한국형 경찰 캐릭터가 나와도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들이 괜찮은 경찰 미스터리를 들고 나온다고 해도 외면당할 상황입니다. 그러니 한국 대중문화에서 경찰 이미지가 개선될 기회도 오래 찾아오지 않을 것 같군요. 한국 추리가 부활하려면 멋진 경찰 주인공도 필요한데, 한국 경찰들 정말 가지가지로 도움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