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트랜스포머보다 건담이 필요해 2009/07/28

딸기21 2020. 6. 16. 21:31

세 로봇의 귀환
 
요즘 일본에선 세 로봇이 화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1980년대를 상징하는 ‘건담’, 90년대를 상징하는 ‘에반게리온’, 그리고 이 두 로봇의 왕고참 선배 격인 로봇 애니메이션의 고전 ‘철인 28호’다.
 
먼저 건담. 올해 30주년을 맞아 도쿄의 유명 관광지인 오다이바에 실물 크기로 동상이 세워졌다. 높이 18m에 무게 35t짜리 이 동상 제작 과정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건담 붐이 일었고,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도쿄 오다이바의 새 명물이 된 실물크기 건담. 밤에는 불도 들어온다.

 

다음은 철인 28호. 건담처럼 실물 크기 동상이 고베 아카마쓰 파크에 만들어져 다음달 공개된다. 역시 제작 과정이 낱낱이 인터넷에 생중계되듯 전해지며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에반게리온. 한국에선 로봇 영화 <트랜스포머2>가 극장을 휩쓸고 있는데, 일본에선 로봇 애니메이션인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破)>가 개봉과 동시에 1위에 올라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 바람에 <트랜스포머2>는 3위로 밀렸다.

 

 

셋 다 캐릭터로는 할아버지들이다. 철인 28호는 데뷔한 지 53년, 건담은 30년, 에반게리온은 15년이 흘렀다. 이 노익장 세 로봇이 대중의 관심 속으로 되돌아오는 계기와 과정을 보면 장수 캐릭터가 갖는 ‘부활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건담과 철인 28호는 관광상품 확보에 목말라하는 지자체들의 구상에 따라 동상으로 만들어지면서 다시 인기를 얻었다.

에반게리온은 2000년대 중반 에반게리온 파친코가 나와 인기를 끌면서 다시 바람을 탔고 신극장판이 리메이크됐다. 일본 파친코 업계는 인기 좋은 문화상품이 있으면 절대 놓치지 않고 파친코 영상으로 활용한다. <겨울연가> 파친코도 나왔고, 최근에는 <대장금> 슬롯머신을 만든다는 뉴스도 나왔다. 주 고객인 중·장년 남성들에 더해 젊은 층과 여성까지 고객으로 끌어들이려는 파친코 업계의 전략인데, 이런 과정에서 에반게리온 같은 문화 아이콘들이 재조명되는 묘한 결과가 나온다.

 

유씨씨와 사진으로 계속 중계되는 철인28호 제작과정.

 

중요한 것은 어떤 작품들이 이렇게 다시 활용 대상으로 선택되느냐는 거다. 이 세 로봇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새로운 장르의 창시작’이란 것이다.

<바벨 2세>로 유명한 만화가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대표작인 <철인 28호>는 ‘거대로봇’(슈퍼로봇) 장르를 열었다. 아톰처럼 의인화된 로봇, 안드로이드풍의 로봇들이 주류를 이루던 초기 로봇 만화들과 달리 영웅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로봇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철인 28호 이후 70년대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은 마징가Z로 대표되는 슈퍼로봇의 시대를 맞는다.

 

 

슈퍼로봇의 시대를 접고 ‘리얼 로봇’의 시대를 연 작품이 바로 건담이다. 건담은 지구를 지키는 우리의 친구 같은 거대한 영웅형 슈퍼로봇과 달리 훨씬 사실적인 새로운 로봇 유형을 선보였다. 건담이 쓴 새 문법을 이어가면서 또 다른 문화적 충격을 줬던 에반게리온은 건담과 다른 생체적인 로봇을 들고 나왔다.

이 세 로봇은 장르를 연 선구적 작품은 세월을 뛰어넘는 생명력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를 처음 보여준 작품을 기억해주기 때문이다.


올여름 극장가를 보면서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67년 최초의 한국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등장한 이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산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하지 않은 해는 없었다. 그러나 <천년여우 여우비> 이후로는 자취를 감췄다. 지난해 한국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사라진 뒤 올해도 절반이 지나가는데 개봉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나락에 떨어진 요즘 한국 애니메이션에 필요한 작품은 일본·미국의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거대 블록버스터가 아니다. 작고 투박해도 그동안 없었던 장르를 만드는,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 나와야 한다. 철인 28호도 만화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스케치였고, 건담도 장난감 팔아보자고 궁리하다 나온 산물이었다. 대신 조금 더 새로웠다. 똘똘한 애니메이션 하나면 장르가 생긴다. 1천만 명이 보는 흥행작보다 찔끔찔끔 파생작을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이 지금 한국에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