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가구의 세계

구호의 역설 2005/11/06

딸기21 2018. 6. 5. 16:25

"서울의 거리를 온통 채우고 있는 간판들이 내지르는 소음이 소비의 소란스런 아우성이라면 평양의 건물 옥상마다 올라가 있는, ‘일심으로 옹위하자’에서부터 ‘우리는 행복해요’까지 각종의 구호들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서먹한 선전이었다. 평양은 가히 ‘구호의 도시’라 할만하다. 자부심이거나 혹은 자기최면일 구호들은 성긴 거리의 여백을 메우고 인민의 빈틈을 채운다." 

양상현 민족건축인협의회 의장(순천향대 건축학과 교수)가 평양의 건축을 둘러보고 쓴 `평양 건축물 인상기'의 일부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구호의 역설'이 떠올랐습니다. 

구호는 `~해라', `~하자'는 외침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호가 나온다는 것은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구호의 역설'입니다. 평양 거리를 메우고 있다는 그 수많은 구호들은 그만큼 평양의 생활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어떨까요? 이제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우리 거리 역시 구호들이 넘쳐납니다. 


서울 신촌로터리 중앙분리대 `바르게 살자' 석조 조형물. (자료출처: 네이버)

 

신촌로터리 차들이 돌아가는 중앙 분리지역에는 큼직한 화강암에 `바르게 살자'고 새긴 조형물이 있습니다. 신촌을 지날 때마다 저 조형물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도대체 저 다섯 글자를 새기려고 얼마나 많은 돈을 써버린 것일까.' 


국민 세금으로 지원 받는 단체들이 저런 돌 장난이나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수준입니다. 이 돌비석을 세운 단체는 이름조차 역설적인 `바살협'(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입니다. (** 바살협은 전두환 정권때 삼청교육대를 만든 사회정화위원회의 후신입니다. 이 바살협을 비롯해 자유총연맹 등 3대 관변단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논의는 오래되었습니다만, 해당 단체와 한나라당 등의 반대에 항상 막혀왔습니다.) 


구호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쓰레기가 많으면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 간첩이 많으면 `신고를 잘하자'는 식으로 목적을 정확하게 밝혀야 구호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련데 사람마다 철학이 다르고 기준이 다른데 밑도 끝도 없이 `바르게 살자'라니요. 


구호라는 것은 그 속성상 거리에 나붙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거리 설비인 `스트리트 퍼니처'들 가운데는 이런 구호를 위한 것들이 많습니다. 아예 구호 자체가 스트리트 퍼니처가 되기도 하지요. 바로 이런 조형물들입니다. 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는 특히 이런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그 때도 아닌데, 이런 조형물이 거리에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보면 `구호'와 관련된 스트리트 퍼니처들은 여전히 우리 거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이런 구호 관련 스트리트 퍼니처들이 많다는 것 자체가 아직 우리사회가 덜 성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지요.


다행히 90년대 이후 구호들은 많이 줄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그만큼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계몽하는 것이 더이상 먹히지 않게 된 것이고, 구호를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촌스러운 것인지 공감대가 커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호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광화문 거리를 걷다가 낡은 가로수 보조물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가로수 나무 주변 땅위에 덧씌우는 철제 발판인데, 제법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보조물 동그라미 무늬 안에 구호가 숨어있었습니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뒷편 가로수.


`나라사랑, 나무사랑'. 


최근 새로 만든 가로수 보조물에는 서울시 로고가 선명할뿐, 이제 이런 구호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조금 있으면 바뀔 가로수 보조물에도 구호가 들어갔던 시절이 떠올라 쓴 웃음이 지어졌습니다. 


바살협이 저런 돌 조형탑을 만들었다고 해서 얼마나 들었는지 보도자료를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양반의 고장 상주시 한 면에 2005년 바르게살기운동위원회가 면사무소 앞 소공원에 `바르게 살자' 조형물이 세웠습니다. 


`우리는산수를 사랑하며 고장을 빛낸다.' 

`우리는 도덕을 숭상하며 예의를 갖춘다' 

등등 5가지 면민헌장을 높이 3미터, 너비 1미터가량의 화강암에 새겼답니다. 


보도자료를 보니, 이 조형물에는 모두 905만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만든 분들께서는 좋은 뜻을 알리는 일이니 1천만원 남짓한 돈이 아깝지 않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뜻은 모두의 마음에 새기고 그 비용으로 온 면민들이 더 사랑할만한 조형물을 만들었다면 상주 거리가 더 아름다워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구호가 가득한 평양의 모습은 분명 후진적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촌스런 구호의 티를 벗어내려 하고 있습니만, 권위주의 정권 수십년이 남긴 그 지독한 버릇이 아직은 떼어내기 힘든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