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극강의 음질 ‘슈퍼오디오 CD’ 왜 한국에 없지? 2009/05/12

딸기21 2019. 6. 26. 14:33

최후의 CD, SACD
 
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당시 처음 나온 CD를 봤을 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오디오 바늘이 없이 빛으로 음반을 읽어 소리를 낸다니! 정말 ‘꿈의 음반’이었습니다.



차가울 정도로 깨끗한 소리에 반해 방안 가득 CD를 모으는 날만 오기를 꿈꿨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시디를 살 돈은커녕 메탈테이프 사기도 어려웠으니, 결국 제가 제 소유의 CD플레이어를 가지게 된 것은 1989년에 이르러셔였습니다. 과외비로 번 돈을 몽땅 쏟아부어 마련한 인켈 오디오가 당시 돈으로 한 80만원 정도들였으니 돈 좀 썼습니다.
 

마음은 이놈을 꿈꿨으나 현실은 역시 인켈. 


시디값은 또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록 몇장, 클래식 몇장, 그리고 영화 오에스티 몇장을 사면 돈 10만원을 넘겼습니다. 제 시디가 처음 100장을 넘겼을 때 무척 뿌듯했습니다. 과외비 타면 기존 LP판으로 갖고 있던 것들을 한두장씩 시디로 바꿔나가곤 했습니다. 
 
이후 90년대 초반 시디는 완전한 대세를 이룹니다. 엘피는 사라지고 시디 이외에는 음반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값이 내려갔고, 저는 싼 시디, 중고 시디에 맛이 들려 틈만 나면 사서 모으곤 했습니다. 결국 2000장쯤 되고 말았죠.


요즘에는 방 안 가득한 시디를 보면서 왜 저리 모았는지 의아하기도 합니다. 얼마전 ‘내가 무인도에 간다면 가져갈만한 시디’를 한번 꼽아봤는데 100장 꼽기도 벅찼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실은 거의 완전히 음악과 멀어졌습니다. 음악을 듣는 일도 없습니다. 아직 저는 제 소유의 엠피3을 사보지 않았습니다. 아이팟 새 제품을 보면 탐이 나지만, 사기도 귀찮습니다. 그 파일을 일일이 찾아서 넣을 생각을 하면 그냥 안사고 말게 됩니다.
 

물론 이런 놈이 하나 생기면 열심히 음악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애물단지처럼 된 방안의 CD들을 보면서 문득 음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오디오로 좋은 음악을 들으면 음악을 다시 사랑하게 될까? 
내 처지에 더 좋은 음질로 듣는 법은 없을까?
 
두가지 방법이 있겠죠. 
먼저 좋은 오디오로 바꾸는 것. 사실 지금 저희 집 오디오는 고장난 상태입니다. 고치러 가야하는데 그것도 귀찮아 못고치고 있는 지 10년 쯤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좋은 음반으로 듣는 것. 시디말고 또 있냐구요? 사실 있습니다. 시디가 진화하여 최고의 음질에 도달한 SACD, 슈퍼 오디오 시디가 있습니다. 문제는 국내에서 이 음반을 사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비싸기도 하구요. 기기도 결국 바꾸거나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이런 놈은? 집에 있는 오디오먼저 고쳐봐야지... 

  
엠피3을 다시 생각해보지만 이어폰과 헤드폰을 싫어하는 저 같은 사람들에겐 참 휴대용 음악재생기는 계륵입니다. 어디 정답이 없을까요?


쓸데없는 생각을 이리저리 하면서 <한겨레21>의 칼럼을 이 주제로 잡아 마감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시험에 안 나오는 문화] 귀는 눈보다 민주적이다

지난 10년 영상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음향 기술은 멈춰 있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주로 두 가지 감각으로 문화를 즐긴다. 시각과 청각이다.  이 두 감각으로 즐기는 문화 소비에는 공통점이 있다. 전자 기술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비디오와 오디오, 이 두 가지 기기는 현대인의 문화생활에서 절대적이다. 
전자 강국 한국의 소비자들을 보라. 단칸방 신혼살림에도 40인치 액정표시장치(LCD) 텔레비전과 홈시어터를 들여놓는다. 집 밖에선 휴대전화와 휴대형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로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이처럼 왕성하게 보기와 듣기를 즐기는 나라도 없어 보인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지난 10여 년 사이 우리가 즐기는 영상의 기술적 수준은 얼마나 높아졌을까?
실로 혁명적으로 좋아졌다. 브라운관을 크기로 압도한 프로젝션 텔레비전이 나와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순식간에 PDP와 LCD가 대세를 장악했다. 이번엔 LCD보다 화질이 한 단계 더 도약한 발광다이오드(LED) 텔레비전이 나왔다.

영상 기술은 또 얼마나 좋아졌는가. 고화질(HD) 방송은 여자 탤런트의 피부 컨디션까지 보여준다. VCR 테이프를 어떻게 봤나 싶게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DVD로도 부족하다며 블루레이(Blue-ray)가 등장했다. 덕분에 우리의 눈은 점점 즐거워지고 있다.

그러면 듣는 즐거움은? 당연히 10년 전보다 더 좋은 음질로 음악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뜻밖에도 전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듣는 최고 음질은 등장한 지 30년 가까이 된 CD에 여전히 멈춰 있다. 대중이 즐겨 듣는 MP3의 경우 음질은 오히려 퇴보했다. 음악을 파일로 저장하기 좋게 음의 가장자리를 잘라내는 탓이다. 휴대용 음악기기들이 늘어나면서 오디오도 점점 사라져 이젠 소수 하이엔드 팬들만의 것처럼 돼간다. 결국 지난 10여 년 동안 음악 감상의 측면에선 전자 기술의 진보에 따른 음질 발전의 혜택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영상 기술만 발달하고 음향 기술은 답보했다는 말인가? 물론 그럴 리 없다. 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한 기술적 노력은 늘 이어져왔다.

그렇게 CD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기술 방식이 SACD, ‘슈퍼 오디오 시디’다. 기존 CD는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 주파수대만 뭉뚱그려 저장한다. 하지만 SACD는 담는 소리 주파수대를 훨씬 넓혀 자연의 소리에 가깝게 선명하게 담는다. 현존하는 최고의 음질이다. 당연히 음악 감상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준다. 그래서 예전 LP 시절의 명반들이 SACD로 재발매되고 있고, ECM 같은 폼 잡기 좋아하는 유명 레이블들은 CD만이 아니라 SACD도 함께 발매한다.

그러면 왜 한국에선 이 ‘슈퍼 오디오 시디’를 볼 수 없을까? 아직 따끈따끈한 최신 기술이어서? 아니다. 필립스와 소니가 이 SACD를 개발한 지 올해로 벌써 10년이 됐다. 진작 나온 SACD가 한국에 없는 것은 아무도 이 방식으로 음반을 발매하지 않아서다. 당연히 SACD 플레이어도 보급되지 않는다. 음악 파일 다운로드가 보편화돼 음반 시장은 사라지고 음원 시장만 남은 한국에서 유독 심한 현상이다. 그러나 외국이라고 SACD가 널리 보급된 것도 아니다. 음악 시장의 주류는 어느 나라나 아직 CD에 머물러 있다.

음악에서 기술 발달은 감상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한다. 기존 CD로 최고의 소리를 들으려면 수백만, 수천만원짜리 명품 오디오가 필요하다. 하지만 SACD로는 훨씬 더 싼 오디오 기기로도 그런 수준의 감동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도 SACD가 CD를 대체하지 못하는 것은 기술의 시대, 경쟁의 시대, 문화의 시대에 벌어지는 역설이다.

비디오와 오디오에서 벌어지는 신기술 도입 행태의 차이는 결국 시각과 청각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각은 ‘새로움’을 좋아한다. 나쁜 화질은 참지 못한다. 그래서 좋은 화면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써야만 한다. 반면 청각은 ‘익숙함’을 좋아한다. 그리고 마니아가 아닌 이상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준만 되면 더 이상 음질에 신경쓰지 않는다. 청각은 그런 점에서 시각보다 둔감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민주적인 감각이다. 


그래서 음향 분야에선 기술적인 정답이 산업적 정답이 되지 못하곤 한다. LP의 시대에도 음질이 진일보한 슈퍼 아날로그 LP가 나왔지만 결국 일반 LP를 대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늘 진보하며 대중을 기다리는 것, 그게 또한 기술의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