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하프의 비밀-하프는 백조다 2009/04/08

딸기21 2018. 12. 31. 15:48

첼리스트는 소형차를 못탄다?


클래식 연주자들을 보면 악기 크기 따라 참 고생도 많이 한다는 생각도 든다. 

첼로 주자들을 보라. 그 무거운 하드 케이스 가방을 낑낑 메고 가는 여학생을 보면 안쓰러울 정도다. 다행히 악기 하드케이스 소재는 첨단 기술 덕에 날로 발전한다. 그래서 전보다는 훨씬 강하면서 가벼워지고는 있다. 영화 <007 리빙 데이라이트>에서는 제임스 본드 티모시 달튼이 첼리스트 본드걸 미리암 다보의 첼로 케이스를 썰매 대용으로 써서 눈위를 미끄러져 적들의 추격을 피하는 장면도 나온다. 


첼로는 승용차도 쏘나타 이상을 사야만 한다. 작은 차엔 안들어가는 탓이다. 비행기를 탈 때도 첼리스트들은 티켓을 두 장 사야 한다. 현악기는 프로용이면 최소 수천, 보통 억대다. 그런 악기를 짐칸에 실을 수 없는 법. 옆자리에 고이 모시고 비행기를 타야 한다. 

 

그러니 콘트라베이스는 어떻겠는가? 첼로보다 더 크니 말이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들은 그래서 평소 악기를 잘 들고다니지 않는다. 들고 다니기 벅차서 악기를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신 활만 들고 다닌다. 어쩌다 들고 이동할 때면 보통 고역이 아니다. 

타악기 주자도 악기를 직접 들고 다니기는 불가능하다. 타악기는 종류도 많고, 악기 크기도 가장 큰 축에 속한다.

 

반면 플루트나 클라리넷 정도면 들고 다니기에 부담은 크지 않다. 그래도 보기보다는 상당히 무겁다. 악기를 담는 가방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금관 악기들은 생긴 모양 때문에 가방도 당연히 무척 뚱뚱해진다. 배낭가방에 메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부담스러울 정도다. 그낭 하드케이스도 거의 무슨 기계 장비를 숨겨놓은 박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악기보다 더 큰 악기가 있다. 역시 들고 다닐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 악기다. 현악기에서 가장 덩치 큰 악기일 하프다.  




하프는 예상 이상으로 크다. 옮기는 것조차 기술일 정도다. 입학 시험 한번 보려면 수험료 못잖게 운반비가 드는 악기다. 

이런 커다란 악기를 하게 되는 것은 연주자의 운명이자 팔자일 것이다. 배우자는 바꿀 수 있어도 연주자가 전공 악기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 하프 주자에게 하프는 운명이다. 다른 악기보다 더 커서 신경이 훨씬 많이 쓰이는 그런 악기지만 소리 하나 때문에 악기에 운명을 거는 것이다.

 



이 하프처럼 잘 알려진 악기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한겨레21> 칼럼에 짧게나마 이 아름답고 거대한, 그러면서도 보기 힘든 악기에 대해 끄적거려봤다. 가장 조각작품 같은, 그러나 가장 볼 일 없는 악기 하프는 사실 백조같은 악기다. 왜 백조일까? 한번 읽어보시길.


[시험에 안나오는 문화] (2)하프가 환상적이라고? 

 

드라마 <꽃보다 남자>(꽃남)가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 시대의 온갖 환상을 노골적으로 종합해 보여주는 점이었다. 이야기 전체, 장면 하나하나를 대중의 온갖 환상과 로망만으로 만든 드라마라니. 인기가 없으면 이상할 노릇이다.


이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 <꽃남>이 소품처럼 가져다쓴 또 하나의 환상을 볼 수 있었다. ‘악기에 대한 환상’, 정확히는 ‘하프’에 대한 환상 말이다. 금잔디를 제치고 구준표를 차지하려는 장유미는 호텔 풀장 앞에서 하프를 연주한다. 상류사회의 파티, 우아하고 폼나는 연주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기 위한 악기로 하프 말고 또 무엇을 고르겠는가. 들고 있는 모습만 봐도 힘들어 보이는 튜바, 부는 모습이 고통스러운 오보에, 둥둥둥 바쁘게 북채를 놀려야 하는 퍼커션 연주를 고를 리 없다. 하프가 아니었다면 ‘공주 악기’ 이미지가 강한 플루트가 나왔겠지만, 환상적인 이미지 면에서 플루트도 하프에는 게임이 안 된다.


<꽃남>의 하프 연주 장면을 보면서 혼자서 괜한 상상을 해봤다. 하프의 실제 연주 모습을 보여줬다면 사람들이 그런 환상적인 느낌에 빠져들 수 있을까, 라고.


하프는 실제 환상을 부추기는 힘이 강하다. 우선 악기 생김새가 환상적이다. 다른 어떤 악기보다도 장식을 많이 해 악기 자체가 조각작품처럼 화려하다. 이 아름다운 악기를 어루만지듯 연주하는 하피스트의 모습은 하프에 대한 환상을 더욱 확실하게 심어준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하프의 절반일 뿐이다. 드라마에선 하프를 연주하는 상반신을 비출 뿐, 하피스트의 하반신을 보여주진 않는다. 하프가 ‘백조 같은 악기’이기 때문이다.


물 위에서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백조의 모습은 우아하고 환상적이다. 그러나 물 밑에서 두 발은 너무나 바쁘고 빠르게 물장구쳐야 한다. 하피스트의 농현하는 손놀림도 물 위의 백조처럼 우아하고 환상적이다. 하지만 하피스트의 발은 물속 백조의 발처럼 바쁘다. 반음을 내느라 7개의 페달을 정신없이 밟아야 한다.


그 연주 모습을 보면 하프에 대한 환상이 깨질지는 몰라도 하프란 악기를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에 우아함과 추함은 없다. 악기가 소리를 내는 구조에 맞춰 생겨먹은 모양대로 연주할 뿐이다.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금관악기 연주자의 웃기는 뺨도, 하피스트의 방정맞아 보일 수 있는 발놀림도, 해금 연주자의 그윽한 팔동작도 모두 좋은 소리를 내려는 자연스러운 동작들이다.


하프의 구조. 페달이 없는 레버 하프도 있지만 아무래도 페달 하프가 주종을 이룬다.


한국에서 하프는 환상의 대상인 동시에 이상한 오해로 고생하는 악기이기도 하다. 하프가 하도 비싼 나머지 전공하는 사람이 없어 악기만 장만하면 음대에 진학할 수 있다는 낭설이 아직도 돌아다닌다. 새마을운동 이전에나 가능했을 법한 이야기다. 물론 하프는 비싸다. 그러나 하프보다 비싼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더 많다.

하프는 그 어떤 악기보다도 오래된 악기이며, 다른 악기의 아버지가 된 중요한 악기다. 사냥을 하던 시절, 팽팽한 활줄을 놓을 때 나는 소리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악기를 착안했다. 그렇게 하프를 만들어 즐겨오던 사람들은 하프와 구조가 똑같은 새로운 악기를 착안한다. 어떤 것일까? 

피아노다. 왜 피아노일까 싶다면 그랜드피아노 뚜껑의 모양과 하프 모양을 비교해보라. 세워 연주하는 하프를 옆으로 눕히고 손으로 퉁기는 대신 망치로 두드리는 것이 피아노다. 하프의 반음페달이 그대로 피아노에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하프 피아노. 하프와 피아노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시조새 같은 악기라고나 할까. 피아노보다 작고 가벼워 실내에서 쓰기 좋은 악기다.



피아노는 너무나 친숙한데 정작 피아노를 낳은 하프는 아직도 우리에겐 낯설기만 하다. 그동안 수준급 하피스트가 드물어 연주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탓이다. 이젠 많은 하피스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연주회에 가면 아름다운 소리를 내려고 부지런히 페달을 밟는 발놀림도 한번 눈여겨보자. 환상적인 악기는 없다. 환상적인 음악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