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훔치고 싶은 정민 교수의 손글씨 2009/01/03

딸기21 2018. 9. 14. 15:55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본 지 얼마만일까.


세밑 어느날, 회사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연하장이 하나 와 있었다. 한양대 정민 교수의 연하장이었다. 

문득 정교수의 연구실이 떠올랐다. 그가 생각의 씨앗들을 정리해놓은 파일 정리대, 관심 갖는 분야가 비슷해 탐났던 그 많은 책들, 그리고 전각들... 그 자료더미 속에서 주말에도 글을 쓰는 정교수도. 


직접 손으로 그린 우편번호 네모칸이 얼마나 참한지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유독 맘먹은대로 안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 맘에 드는 나만의 글씨체를 갖는 것이다. 서예와 전각도 배우고 싶었지만 게을러 늘 못해왔다. 

 

기자가 된 뒤로는 더욱 글씨를 못쓰게 됐다. 바쁘게 빨리 들은대로 메모하는 것이 중요하다보니 글씨가 점점 괴발개발이 됐다. 지금 내 글씨는 탭댄스 추는 지렁이 모양이다.



 

정교수의 손글씨를 보니 그의 글과 성품을 잘 닮았다. 고전적이면서도 모던하달까. 문체처럼 글씨도 꼭 그렇다. 정갈하면서도 휙휙 날리는 모양이 근사하다. 자기 스스로 다듬어 만든 자기만의 글씨체를 갖는 것은 참 멋지고 행복한 일일게다. 

 

정성이 묻어나는 연하장을 받으며 무척 감사하고 죄송했다. 먼저 연하장을 보내드렸어야 하는데 말이다. 언제나 선배들에겐 배우기만 한다.

봉투를 뜯어보니 역시 손글씨 연하장이 들어있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 달음박질로는 오래 못가나니 또박또박 한발짝씩 나아가야 천리를 가는 법. 성격이 급한 내게 꼭 들어맞는 경구였다. 어려운 시기, 소처럼 살 일이다.

 

연하장을 잠시 들여다보면서 정 교수의 열정이 부러웠다. 그는 남들보다 네 배는 바쁘게 살면서도 글씨 쓰기와 돌파기를 가까이한다. 

 

손글씨를 보면서 샘이 샘처럼 솟아나는 것도 어쩔 수없었다. 

잘 쓰는 손글씨를 보면 늘 부럽고 샘이 난다. 이철수씨의 글씨나 신영복 선생의 글씨를 볼 때마다 부럽듯 정교수의 글씨도 부럽다. 



 

지금이라도 서예를 배워볼까, 전각을 시작할까 잠시 공상에 빠졌다. 그리고 반성도 해야 했다. 내년부터는 근사한 손글씨 부러워하기 전에 주변분들에게 연하장이나 제대로 보내자고.


 

가끔 인정할 건 인정하고 살아야겠다. 글씨, 그거 아무나 되는 건 아니라고 말이다. 

그래도, 혹시 소걸음 가듯 글씨 연습을 해보면 나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