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친해지기

마초, 페미니즘 미술가에 반하다 2008/05/22

딸기21 2018. 9. 5. 14:20

고백하건대, 서울에서 났지만 경상도 집안에서 경상도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자란 나는 꼴 마초에 가깝다. 그러니, 페미니즘 미술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는 지지해도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전혀 친하고 싶지 않았다. 페미니즘 미술가들의 문제의식과 진정성을 모를 바가 아니나 그런 미술을 즐기고 싶진 않은 탓이다. 윤석남 화백 작품만은 예외였지만. 


주디 시카고? 신디 셔먼? 유명하고 중요하다고 하니 작품을 보기는 봤는데, 속으로는 ‘너무 윽박지르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그런 센 미술보다는 보기 편한 미술이 더 좋았다. 프리다 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출산현장을 그린 그림을 집에 걸어놓고 싶은가? 마돈나는 그런 모양이다. 칼로의 그림을 사갔다니. 나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다. 페미니즘 미술계 최고의 스타이자 대모격인 루이스 부르주아에 대해서도 비슷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실제 그의 작품들은 내 취향이 전혀 아니었고, 꼭 저런 표현을 써야 돼?라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가령 남자의 거시기를 거대하게 만들어 갈고리에 걸어놓은 작품 같은 것들 말이다. 발상은 재미있고 문제의식도 알겠으나 보면서 즐겁지는 않았다. 


페미니즘 미술은 물론 현대 미술 최고의 대가로 꼽히는 루이스 부르주아 할머니시다. 1911년생이니 올해 나이 무려 아흔일곱.



그러던 어느날, 이 마초가 갑자기 루이스 부르주아에게 반해버렸다. 그의 대표적 조각작품 <마망>을 보고 이 할머니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왜? 당연히 작품이 너무 좋아서다. 도면으로 보던 <마망>과 실제 내가 만나서 만져본 <마망>은 전혀 달랐고, 정감이 팍팍 들었다. 역시 작품은 실제로 봐야 한다는 걸 새삼 실감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마망>은 엄마 거미를 형상화한 조각이다. ‘마망’이란 말도 ‘엄마’라는 뜻이다. 루이스 부르주아가 평생 아버지 때문에 맘고생하면서 자식들을 키운 자기 어머니를 생각해 ‘모성애’를 주제로 만든 작품이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이 <마망>을 처음으로 본 것은 일본에서였다. 지난해 출장길에 롯폰기 모리타워에 들렀는데 그곳에 마망이 떡 버티고 있었다. 아하, 바로 저놈이구만. 멀리서 봐도 바로 마망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상 이상으로 녀석은 거대했다. 그럼에도 위압적이지는 않았다. 긴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다리로 동그랗게 관객을 품어주는 것 같았다. 청동 거미의 거대한 다리 사이로 관객들이 오가는 것이 색다른 재미였다. 


실제로 보기 전, 책과 도면으로 <마망>을 봤을 때는 지레 이렇게 짐작했었다. ‘모양이 인상적이군, 그렇지만 왜 하필 거미야? 실제로 보면 좀 흉칙해보이지 않을까?’ 그런데 실제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거미로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쉽게 이해가 되는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에게 감탄하게 됐다. 거미 다리 사이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런 것을 연출한 작가에게 바로 무릎을 꿇었다. 천재 부르주아 할머니, 제가 모르고 까불었습니다. 앞으로 저를 팬으로 받아주소서.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마망>의 핵심이라는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 배에 달려있는 알주머니다. 저 엄마 거미는 지혜라는 알을 저렇게 배에 달고 있다. 그런 어미의 모습, 그게 부르주아가 모성애로서 표현한 부분이었다. 그 안에 들어와 바라보는 나도 저 어미 거미의 뱃속에 있는 새끼거미가 된 듯했다.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같은 미술에 어찌 저항하랴. 그냥 좋은 거,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마망을 시작으로 페미니즘 미술에 대한 취향도 조금씩 바뀔 것 같았다. 페미니즘 미술이여, 모성애를 이야기 할 때는 마망만 같아라.



일본에서 돌아온 뒤 한참 지났는데 문득 마망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 가자.


조각을 보겠다고 일본으로? 물론 그럴수야 없잖겠는가. 내가 재벌도 아니고. 일본까지 안가도 얼마든지 마망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마망이 있으니까.


우리나라가 옛날과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바로 이런 순간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가들의 작품이 이제 국내에도 제법 있다. 십몇년 전만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저 마망도 국내에 들어와 있다. 마망이 있는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으로 향했다. (조각은 원래 오리지날이 여럿이다. 대신 갯수 제한이 있다. 마망은 워낙 인기좋은 유명 작품이어서 세계 곳곳에 마망이 있다.)


리움은 정말 좋은 미술관이다.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좋은 작품들이 리움에는 수두룩하다. 우리 국보 미술품부터 요즘 가장 잘나가는 외국 현대 작가까지 정말 초호화 캐스팅 영화처럼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소장품들이 좋다. 그 중에서도 마망은 가장 좋은 자리에 있다. 미술관 입구 야외공간에서 손님을 맞는다.




다시 봐도 역시 좋았다. 더욱 맘에 들엇던 것은 리움에는 엄마 마망뿐만 아니라 새끼인 ‘스파이더’도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흠, 역시 우리 삼성이 일본 모리보다는 더 낫구만.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구입해서 전시했으니. 그렇게 새끼 녀석과는 처음 만났다. 잘 꾸민 너른 공간에 주인이 되어 관객을 맞는 마망 모녀 또는 모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웅장해보였다. 옆쪽에는 역시 루이스 부르주아의 대표적 시리즈물인 <아이 체어>도 있었다. <아이 체어>는 눈모양 의자 조각품으로, 관객들도 직접 앉아볼 수 있으니 리움에 들르는 분들은 앉아서 마망을 쳐다보며 즐겨보시길.


 


그런데, 내가 먼저 만났던 마망과 리움의 마망은 어딘가 달랐다. 리움의 마망은 관객들이 마망을 만져볼 수도, 그리고 그 다리 속을 드나들 수도, 다리 속에 들어가 어미 거미의 알주머니를 볼 수도 없었다. 따로 철조망을 쳐놓지는 않았지만 관객의 동선과 마망이 전시된 곳을 나무 복도와 자갈 바닥으로 구분해서 가까이 갈 수는 있어도 옆에서만 볼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뭐람. 마망의 생명은 그 주제인 모성애를 드러내는 배의 알주머니인데...


아쉬움이 절로 들었다. 1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망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드는 조각품이다. 물론 그런 작품을 보호도 해야되는 심정은 십분 이해가 됐다. 그러나, 마망은 그 배를 봐야 하기에 아쉬웠다.


실제 다른 여러 곳에 있는 마망들은 거의 대부분 관객들과 시민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직접 만나고 있다. 작품 속성상 공공적인 장소에 놓여 많은 이들이 함께 보고 즐기기에 제격이어서 대부분 개방공간에 놓였고 그런 의도대로 시민들의 벗으로 사랑받고 있다.




구겐하임 빌바오 앞 마당에 놓인 저 마망도,




캐나다 오타와에 있다는 저 마망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앞에 전시했던 마망도,




뉴욕 록펠러 센터 앞에 있는 마망도.


모두 개방공간에서 직접 관객들과 만난다. 반면 리움 마망은 그렇지 못하고 관객들과 교감이 차단되어 있고, 결국 관객들 역시 저 마망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 마망을 혹시 가능하다면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임대 형식으로 놔두면 어떨까?

전국 각지 광장에 1년씩 돌아가며 설치하면 어떨까?

그러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저 작품을 즐겨볼 수 있지 않을까?


혼자서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해봤다. 그리고 그런 바람을 담아 기사를 썼던 것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국내 민간 미술관 가운데 단연 최고 미술관이고, 최고 미술관다운 행보를 해왔다. 저 마망처럼 좋은 작품을 구입해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삼성미술관이 있어서 미술팬들은 즐겁다. 저렇게 좋은 작품들을 소장하는만큼 제대로 관객들의 사랑을 더욱 받기를 바란다. 


그러니, 저 거미를 한번 풀어줘 보면 어떨까. 그게 힘들다면 거미를 직접 만져보도록, 배에 있는 알주머니를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지 않을까. 엄마 거미의 진짜 포근함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느껴볼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