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특별한 책상, 특별한 사무실, 건축가 유걸 2008/01/24

딸기21 2018. 8. 12. 14:03

어딘가 이상했다. 건축가 유걸(68)씨가 대표인 건축설계사무소 아이아크 사무실은 들어서는 순간 다른 사무실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이 다른걸까?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파티션이 없었다. 놀라운 것은 책상이었다. 사무실은 전체가 트여있었고, 건축가들이 일하는 책상은 하나로 뱀처럼 이어져 있었다.




책상은 기다란 나무판을 경첩으로 이은 구조였다. 중간에 길이 필요하다 싶으면 경첩을 꺾어 ㄷ자 모양으로 세워 통로를 낸다. 이 독특한 책상은 아이아크의 하태석 건축가가 디자인해 맞춘 작품. “사람이 늘어나 책상이 더 필요하게 되면 접어 올려놓은 복도 부분을 내리면 바로 책상이 늘어납니다.“ 책상은 작업대인 동시에 그 자체로 인테리어 소품이었다.

 


그러나, 진짜 흥미로웠던 점은 그런 책상에서 모두 함께 일하는 사무실의 자리배치였다. 칠순을 앞둔 대표 건축가 유걸씨부터 신입사원까지 이 기다란 책상에 나란히 앉아 마주보며 일한다. 다른 사무실은 자리만 봐도 그 사람의 직급, 그리고 사무실의 위계 구조를 알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게 없다. 자리 사이에는 그 어떤 차단구조물도 없다. 의자 옆에는 모두 바퀴가 달려 밀고 다닐 수 있게 만든 3단 서랍장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자리가 바뀌면 그 서랍장을 밀어서 옮기면 되요.” 역시 유걸 대표의 서랍장이나 신입사원 서랍장이나 모두 똑같았다.


대표 집무실? 이 사무실에 그런 것은 없었다.


밀알학교. 열린 공간속 자유로운 내부 구성이 특징이다. 사진=박영채 사진가



사무실 모습에 이미 그의 건축이 들어 있었다


1층의 테이블로 내려온 유걸씨는 웃으며 “이 테이블은 내가 디자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건축 자재인 철골조 H빔을 잘라내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유리를 얹은 것이다. 유씨의 작품 밀레니엄 커뮤니티센터를 지을 때 쓰고 남은 H빔이라고 한다. 


그를 만나러 간 이유는 그가 대한민국 건축계에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60대에 뜬 건축가다. 그리고 지금 건축계 흐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정말 드문 원로 건축가다.


유걸. 1940년생. 서울대 건축과 졸업, 한국 건축 최고 대가 김수근 밑에서 근무, 미국 건축사 자격증 취득…. 이력만 보면 엘리트 코스 그 자체다. 건축가로 성공 못하면 이상할 듯하다.


실제 그와 비슷한 배경을 지닌 그 또래, 지금 60~70대 건축가 세대들은 행복한 세대로 불린다. 한창 일할 시기가 개발성장기와 맞아떨어진 덕분에 다른 나라 건축가들은 그 나이에 맡아보기 힘들 굵직한 프로젝트들이 쏟아져 나와 일감을 골라했던 세대들이다. 뒷 세대들이 부러워할 프리미엄을 누렸다.


그러나 유걸은 그들 사이에선 전혀 다른 건축가였다. 서른 한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86년 아시안게임 선수촌 아파트 치프 디자이너로 중년 나이에야 귀국했다. 이후 활동을 계속 이어갔지만 이른바 스타는 아니었다. 그가 건축계의 주목을 ‘제대로’ 받은 것은 95년, 밀알학교를 설계해서였다. 나이는 이미 쉰여섯. 

그는 예순 세 살에 교수가 된다. 경희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로 3년 학생들을 가르친 뒤 정년퇴임했다. 그가 퇴임할 즈음 동년배 건축가들은 이미 스케치를 접고 있었다. 건축은 계속 해도 작품활동보다는 경영자로, 인맥으로 일감을 따내는 일에 매달리는게 일반적이었다. ‘쌩쌩한 젊은 후배’들과 감각으로 승부하기엔 나이들었기 때문이다.


밀알학교. 열린 공간속 자유로운 내부 구성이 특징이다. 사진=박영채 사진가


반면 유걸은 거꾸로였다. 환갑을 넘긴 2000년대들어서 그동안 쌓아두었던 에너지를 폭발하듯 창의성을 발휘하며 작품을 내놓았다. 낡은 강당 건물을 완전히 환골탈태시킨 경희대 건축대학원 건물은 일반인들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건축계에선 히트를 쳤다. 밀알학교처럼 이 건물도 거대한 열린 내부 공간이 특징이고, 그속에 자유롭게 통로와 복도, 계단을 배치한 구조가 이슈가 됐다. 나이 60을 넘어 그는 처음으로 전성기를 열었다.


건축에 정년은 없다-건축은 60부터


건축은 나이가 들어 인간과 건축에 대한 생각이 깊어질수록 더욱 좋은 작품이 나오는 장르로 일컬어진다. 실제 세계적 거장들을 보면 노년기에 대표작들을 내놓은 경우가 허다하다. 오토 바그너가 그랬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그랬다. 


물론 국내 건축가들도 그러고자 했다. 우리 건축 1세대 수퍼스타로 젊은 나이에 건축계의 태두가 되었던 고 김수근은 늘 ”건축은 60부터“라고 동료 제자들에게 즐겨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그는 쉰다섯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60대를 맞아보지도 못했다. 문제는 김수근의 후배들이 이를 실현하지 못하는 점이다. 


그런 상황속에서 유걸은 ”건축은 60부터“를 실제로 입증해보였다. 그래서 후배 건축가들은 그를 보면서 희망을 얻는다. 열심히 하다보면 나이가 들어서도 성공할 수 있고, 건축은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희망이다.


그가 또한 놀라운 점은 그가 현상설계에 꺼리지 않고 도전하며, 작은 프로젝트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중진들은 60대를 넘어가면 현상설계 경기에 좀처럼 도전하지 않는다. 젊은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질 경우 쑥스럽기 때문이다. 작은 주택건도 잘 안한다. 체면 때문이다. 그는 그렇지 않다. 완전히 반대다.


요즘 젊은 스타건축가들은 너도나도 대학교수로 간다. 대학들이 실무를 가르칠 교수확보가 발등의 불이 됐기 때문이다. 안정된 직장을 선호해 후배들은 학교로 몰려가는 것이다. 그런 흐름속에서 학교에서 나와 60대 전성기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그의 존재는 또한 도드라진다.

 

왜 이 건축가는 이게 가능했을까?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러 갔다. 그를 소개하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 찾아간 사무실은 그가 왜 독특한지를 절로 느끼게 해줬다. 사무실 책상과 일하는 분위기기만 봐도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젊은 동료들과 똑같은 책상에서 일하며 호흡하는 청바지 차림의 노건축가, 열린 사무실을 지향하는 철학이 이미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그는 차근차근 설명하듯 술술 대답을 이어갔다. 건축 전공자들이 아닌 사람에겐 좀 생소하겠지만 인터뷰를 거의 그대로 소개하려 한다.


사진을 제공해주신 우리 시대의 건축사진가 박영채 선생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건축 사진 박영채 사진가  http://blog.naver.com/pychea 


 




-사무실보고 다른 사람들이 신기해하지 않던가요.

=많이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이런 ‘열린 공간’을 지향합니다. 영국의 노먼 포스터 사무실에 갔는데 꼭 이렇더군요. 

 

-열린 공간에서 젊은 직원이나 대표 건축가나 같은 책상에서 근무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스스로 젊게 생각하기 위한 의도적인 시도입니까?

=일부러 젊게 생각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모두 함께 열려있는 것은 중요해요. 건축설계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여럿이 같이 해야죠.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계적 구조가 있는 사회나 사무실은 세대차이가 생겼을 때 커뮤니케이션하기가 쉽지 않아요. 일을 시킬 수는 있어도 같이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죠.


-한국 사회에선 그런 발상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71년 미국에 가서 저희 애들은 거기서 자랐습니다. 제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이 지금도 아이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아무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한국말로 이야기하면 훈육적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고 받기가 함들더군요. 그런데 영어는 상당히 평등한 언어에요. 영어로 하면 버릇이 없긴 하죠. 그러나 의사소통은 잘 되는 측면이 있어요.


저는 그렇게 아이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가장 좋아요. 아이들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것. 거기서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그렇게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덕분에 일을 할 때 엔조이하면서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건창호.


-우리나라의 30~40년대생 건축가들은 일찍 중진이 되었던 대신 50대를 넘어서 조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선생님은 60대 이후 전성기를 맞았다는 점에서 비교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을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내가 건축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 것이 참 늦어서였어요. 50이 될 때까지도 공부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건축이 이건 왜 이럴까, 라고 생각을 계속했기 때문에 내가 프로로 건축을 한다, 내 업을 삼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아요. 그래서 저절로 늦어진 거에요. 둔해서 늦은 것도 있어요. 그 바람에 식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외국에는 늦게 떠서 70대가 되어서 더욱 활발히 활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쟁이 심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차이인 것 같아요. 외국은 경쟁이 세기 때문에 젊었을 때 스타가가 되기 힘들어요. 프랭크 게리도 60살이 넘어 비로소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했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사회적인 경쟁에 의한 여과과정이 없었던 편이에요. 특히 저희 세대가 자랄 때는 거의 없었죠. 당시 한국 사회에서 서구식 건축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거죠. 우리 동년배는 비슷할거에요. 조국 근대화의 일익을 담당한 점도 있고, 기회가 어마어마하게 있었던 거죠.

요즘 젊은 이들 보면 사방에서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그 저변이 굉장히 넓어서 그 중에 두각을 나타내려면 상당히 경쟁을 해야 될 거라고 봐요. 그게 한국 건축계가 자라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배재대 국제교류관. 사진=박영채 사진가


-선생님 건축은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평을 듣습니다.

=건축을 처음 할 때는 조형의지 같은 것을 강하게 추구했어요. 어떤 형태를 만들어보려는 욕망이 강했죠.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건축보다는 그 속에 사는 사람들에 관심이 좀더 많아요. 그속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해요.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인가요, 선생님만의 특징인가요?

=나이도 관계는 있는 것 같아요. 나이 들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많아지니까.

 

-중진 건축가들의 경우 젊은 건축가들과 경쟁해서 떨어지는 것을 꺼려 공모에 안나가는 편입니다. 작은 주택 일도 잘 맡지 않습니다. 반면 선생님은 공모에도 활발히 도전하고, 작은 집 설계도 꺼리시지 않는 듯합니다. 

=제가 위계질서나 서열에 대한 생각을 안하기 때문에 누구와 경쟁한다는 것에 덜 관심을 가져요. 젊은 사람들 하는 것이니까 내가 안한다 그런 것은 아니죠. 저는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젊은 사람이 기피하지 않는다면 제가 기피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일부러 젊어지려고 추구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 사람들 생각을 든는 것을 엔조이하죠.


젊어지려는 것은 아니야-매번 내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려 할 뿐


-그런 철학에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제가 설계할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이 제가 가진 고정관념을 깨는 거에요. 일단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을 늘 비평해요. 내가 확신했던 것을 검증해보려하고 해요. 그게 아마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닐까해요.

일관되게 무언가를 하려는 것은 없어요. 일관된 것이 있다면 항상 새롭게 되려고 하려는 것이겠죠. 내 자신을 완전히 열어서 보려고 하는 것, 그게 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려 하지만 잘 안됩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분들에 대해 생각해본 것은 없는데…(웃음). 난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한국을 많이 알게 된 것이 미국에 가 있을 때에요. 그 때 느낀게,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덕이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떤 때는 한국 사람들에게 덫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런 것들 중에 가장 큰 것 하나가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인 ‘변하지 않는 것을 굉장히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해요. 남산위의 늘 푸른 저 소나무, 그런 것들을 좋은 것으로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변하지 않는 것이 별로 없어요. 생각을 유연하게 열어 사물을 보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죠. 사회 문화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 봐요.


계산교회. 사진=박영채 사진가


-건축에 최신 재료나 공법을 잘 도입하시는 편입니다.

=우리는 장인정신이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만든 수공품 성격을 지닌 것을 중요하게 여겨요. 현대를 열었던 연 바우하우스 사람들이 주장한 것은 고급예술을 대량 생산해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하자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프린트나 세라믹이 많이 나왔죠.


그런데 이렇게 현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수공업을 생각한단 말이죠. 수공업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건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취향주의라고 봐요. 건축은 공장 생산에 의해 다량 생산할 수 있는 수단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보기도 좋다고 생각해요.

건축이 하는 일이란 것은 그런 생산된 제품을 엮어 나가는 것이거든요. 어떻게 엮느냐 그 디테일이 건축의 재미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저도 예전엔 그랬지만 건축을 그렇게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전통 건축을 볼 때도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이 수공업으로 만든 것이니까 좋은 것이라는 거죠. 그런 생각에서 우리가 이제 떠나야한다, 건축가는 특히 그래야 한다고 봐요. 개인이 취미로 그렇게 하면 그건 괜찮아요. 그렇지만 그게 일반적인 가치를 갖는 생각은 아니라는 거죠.


건축은 기술과 분리를 할 수가 없어요. 건축의 기술은 무거운 것에서 가벼운 것으로 가고 있어요. 기술도 감각도 그렇게 가벼운 쪽으로 갑니다. 저는 요즘 ‘열린 사회, 열린 건축’이란 말을 많이 해요. 1차적으로는 무조건 열려 있는 거라구요. 저희 사무실 보셨듯이. 열려있고, 투명하고. 유리는 공간을 구획을 하더라도 시각적으로는 가장 열어주는 재료니까 선호하죠.

 

화가 서세옥 선생 성북동 주택. 한옥 옆 대나무 뒤 건물이 유걸씨 작품이다.


-화가 서세옥 선생님 집 건물은 일반인들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작업을 선생님은 자신의 주요작으로 꼽으시던데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저는 그 작업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서세옥 선생 댁은 굉장히 좋은 한옥이에요. 한옥이 이렇게 따듯하고 시원할 수 있나 할 정도죠. 그래서 그 한옥이 먼저 존재하는 곳에 새로 지을 집을 설계해야 하는데 참 어렵더라구요. 힌옥과 조화되는 것을 만들려고 굉장히 시간을 많이 썼어요. 그 집이 스튜디오와 집까지 합하면 150평 정도 되는데, 그런 크기 건물을 한옥으로는 그 공간에 넣기가 불가능해보였어요. 한옥이 공간을 만드는 효율은 굉장히 떨어지는구나 그 때 생각했죠.

그래서 아예 서양식 건물로 가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조건으로 보면 가장 먼 생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았어요. 제가 그 때 한 방법이 대비에요. 반대로만 나가자. 기존 건물이 한옥이니 양옥으로 가자. 효율성까지 생각해 완전히 서구적인 것으로 해버리기로 한 거죠. 그렇게 설계를 했는데 서세옥 선생님이 흔쾌히 받아들여주셨어요. 나중에 선생님이 굉장히 잘 사시더라구요. 한학하시고 한옥에서 오래 사셨던 분이 양옥에서도 아주 잘사시는 거에요.

그런데 그러고 나니 한옥 건물이 더 빛이 나더라구요. 그 때 확인을 했어요. 사는 데도 좋고, 한옥도 살고. 한국의 문화적 콘텍스트 속에서 내가 어떤 건축을 할 것인가. 컨텍스트와 조화를 이루는게 최선은 아니라는 확신을 했어요.


-선생님 주요작들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실 대표작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일을 하면서 소홀히 넘긴 프로젝트는 없어요. 그것에 제가 상당히 자부심 갖습니다. 제가 맡은 프로젝트는 끝까지 해드렸어요.

저는 제가 집을 지으면서 건축주들을 알게 되는 것이 좋은 경험이었어요. 제가 설계한 밀알학교가 지은 뒤 두 번에 걸쳐 증축을 했는데 그 때도 제가 맡아서 했어요. 그런데, 한 교수가 묻더라구요. 아니 어떻게 자기가 지은 집을 증축했냐, 그래요. 보통 집을 짓고 나면 건축가와 건축주가 원수가 되는데 저는 안그렇다는 것이죠. 

저는 설계를 새로 시작하면 이번에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상당히 궁금해요. 만난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 아닙니까? 저는 건축주와 제가 같이 설계를 한다고 생각해요.


-환갑이 넘어 대학교수가 되셨고, 대학에서 나오셔서 오히려 더 많은 작품 쏟아내시고 계십니다. 요즘 국내 대학들이 건축 실무 강화를 위해 교수들을 초빙하면서 40~50대 건축가들은 대학으로 너도나도 들어가는 마당입니다.

=제가 예순셋에 들어가서 3년 하고 정년했지요. 사실 저는 남을 가르치는 것을 참 싫어했어요. 50살 될때까지도 남한테 관심이 참 적었어요. 누굴 가르치려면 그 사람을 알아야 가르치겠더라구요. 그 때는 어디서 가르칠 기회가 생겨도 부담스러웠어요. 

그런데 경희대에서 학교에 와달라고 하는데 한번 그 때는 해보고 싶더라구요. 학생들에게 관심이 생기더라구요. 나이가 되니까. 그건 확실히 나이탓인 것 같아요. ‘쟤는 어떻게 생각해서 이런 일을 하나’ 하고 관심이 생겨요.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부담이 되면서도 재미있었어요. ‘아 이놈들 봐라 신기한 생각하네’ 그런 재미죠.

젊었을 때는 완벽주의자였어요. 그리고 좀 건방졌어요. 제가 젊었을 때 김수근 선생이 롱샹교회를 다녀 오시더니 ‘나는 평생 저런 것 하나만 해도 원이 없겠다’ 그러시는 거에요. 저는 속으로 ‘매번 그런 것을 설계해야지 어떻게 평생 그런거 하나 해야 한다고 하시냐’고 그랬어요. 무식했기도 하고 교만하기도 했고. 굉징히 자기중심적이었어요. 

 

배재대 국제교류관. 사진=박영채 사진가


-지금 활발히 작품할 건축가들이 교수가 되면 작품 활동에는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 건축가들 학교 들어가는 것 보면 ‘5년 넘기지 마라’고 그래요. 교수가 천직이면 모르지만 집을 짓는 사람이 되려면 5년 넘기지 말라는 거죠. 교육과 설계는 일이 달라요.

 외국도 실무하는 분들이 설계지도를 하지만 정교수는 아니에요. 젊은 건축가들이 설계를 지도를 하는 것은 좋아요. 그러나 설계에는 결국 큰 도움 안되요. 그런데도 다들 학교로 가는 건 경제적 영향이 커요. 요즘 소규모 사무실들 어렵거든요. 설계사무소도 양극화되고 있어서 그래요. 

 

-건축설계사무소의 양극화 현상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산업 전체의 구조적 문제에요. 한국의 건축판을 보면 건축주 대부분이 건설회사에요. 그 건설회사들이 건축사무실을 보는 시각은 건설할 때 하도급 업체 보는 것과 비슷해요.

 

-요즘 건설회사들은 유명 해외 건축가를 들여오고 있습니다.

=건축이 아니라 브랜드를 사오는 거죠. 외국의 최고 건축가를 사올 때는 한국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나 구겐하임 빌바오 같은 것을 만들겠다, 그런 목표를 세워야 되요.

건축가가 와서 최선의 것을 내놓게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똑 같은 사람이 왔다고 해서 매번 마스터피스가 나오지는 않아요. 음악회를 보더라도 심혈을 기울이는 연주와 그냥 시간 때우는 연주가 있는데, 한국 무대가 심혈을 기울이는 무대가 되도록 만들어야죠.

동대문 디자인파크에 대해서도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자하 하디드가 여기서 베스트를 하게 하자. 그 사람 원하는 거 있으면 모조리 다 지원해주어 최선 다하게 하자. 어차피 비싸게 쓰는 것 그걸 아끼지 말고 최고를 만들게 하자는 거죠.


-경희대 건축대학원의 경우 낡은 강당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내셔서 화제였습니다. 

=저는 인테리어 스페이스가 건축의 요체라고 생각해요. 모양보다는. 내부공간이 제일 중요하고, 내부공간에서 다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상호관계를 맺는 모양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그 안에서 사느냐, 그걸 내가 만들어 내는 거죠.

경희대 건축대학원과 다른 제 작품 건물들이 비슷한 이슈로 다뤄졌는데, 내부의 커다란 오픈 스페이스 속에서, 그 불특정 공간을 쓰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기에 맞게 공간을 사용하게 하자는 것이에요. 이건창호 사옥도 비슷했고.

제한된 기능을 가진 공간은 그 기능이 없을 때는 비어 있어요. 그러나 그런 고정 기능으로 제한하지 않은 공간은 계속 변형해가며 계속 쓴다구요. 그걸 여러 사람이 쓰기 때문에 조절하면서 쓴다는 말이에요. 그런 과정에서 재미있는 관계가 생기잖아요. 건물속 생활, 그게 건축의 생명이라고 생각해요.


-열린 공간에 대해 반발은 없었나요?

=이건창호 건물을 맡았을 때도 열린 공간을 하려 하니가 직원들이 많이 반대했어요. 모든게 열려 있는 것에 대해 거부감들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회장이 확고하게 이렇게 갑시다 한거에요. 사람들은 경험을 해보면 확신을 가져요. 경험이 없으면 과거 경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하려면 상당히 힘들어요.

건축을 할 때 어려운 점이 이부분이에요. 제가 건축을 하는 것은 새로운 것, 그 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것을 하려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전 경험으로 판단을 하니까.


-그걸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을 듯합니다.

=저는 설득이라고 생각을 안해요. 사람들을 보면 다 꿈, 그러니까 바라는 것이 있어요. 그 바라는 바를 이해하면 그 때는 통해요. 건축주의 꿈을 끌어내야 건축을 받아들여요. 내꿈을 주입하면 아무리 좋은 것을 해줘도 열리지 않아요.

 

-선생님 건축의 특징을 보통 합리성이라고들 합니다. 디자인하실 때 형태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을 중시하는 편인가요?

=보통 건축 보고 감동 받았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감동을 사진으로 찍기는 힘들어요. 그 이유는 감동이 모양이 아니라 공간을 통해서 받은 것이어서 그래요.

저는 건축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사람이 그 속에 있어야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건축을 찍을 때 사람이 사진속에 많이 들어가 있어도 좋아해요. 보통은 아무것도 없을 때 찍는게 일반적이죠.

저는 모양보다 공간에 대한 경험에 관심이 많아요. 속 공간들, 그 구성의 성격, 구성의 조직, 그속에서 사람들 사는 모양 등에 거의 모든 설계 시간을 써요. 외피는 그 다음이에요. 그런데 우리 우리 현실에서는 설계 시간이 너무 짧아요. 그래야 외피까지 더 신경 쓸텐데.

 

-요즘 건축을 길로 해석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선생님 작품은 특히 그런 경향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건물 내부로 외부의 길이 들어오기도 하고, 내부 공간도 길들이 자유롭게 이어지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건축공간을 정적으로 보지 않아요. ‘건축은 응고된 음악’이라고 하는데, 저는 ‘응고된’을 떼어내고 ‘건축은 음악’이라고 해야 맞다고 봐요. 건축은 그 안에서 사는 사람하고 한꺼번에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그속에 사는 사람은 항상 움직인단 말이에요. 응고된 형태를 만드는게 아니고 그속에서 사람이 다니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건축을 평할 때 건물에 앉아 마당을 내다보며 경치 좋다고 하고, 이런 점으로 건축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생활에선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움직이는데 한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움직이면 더 다양한 역학관계가 생겨요. 굉장히 다양한 움직임 속에서 그 공간이 경험이 된단 말이에요. 그 움직임의 트레이스를 만드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경희대 대학원 건물의 경우는 가운데 큰 공간을 두고 거기 다리도 만들고 계단도 내고, 건나가다가 공간이 넓어지면 거기서는 와글와글하고…. 그런 것을 시뮬레이션으로 보고 콘트롤 하기도 하는데, 그런 작업이 안무가와 비슷한 성격이 있어요. 춤을 추는데 안무가가 군무를 할 때 동선을 계획하는 것과 비슷한 거죠.

 

-합리적 선택을 위해서는 모양을 희생할 수도 있는 건가요?

=모양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편의성이 잘되면 모양이 좋아지는 거에요.


-건축계에선 선생님 정도시면 젊은 건축가들과 경쟁 공모 안하고 주택 같은 작은 프로젝트 안해도 먹고 사실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시냐고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웃음)저는 일을 해야 먹고 살아요. 먹고 살기 위해서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제가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것에 감사하고 있고. 

저는 심각한 상태에서 제 베스트를 못해요 저는 기분이 좋을 때 베스트를 해요. 일을 할 때 노래를 많이요. 그래서 저는 일할 때 긴장되고 피로하고 그러지 않아요. 새로운 것이 잘 안되면 힘은 들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절 즐겁게 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