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역사상 최고의 팔방미인 천재는? 2007/8/29

딸기21 2018. 6. 14. 15:51

역사상 최강의 팔방미인 천재는 누구일까요? 

많은 분들이 ‘팔방미인의 대명사’ 격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떠올리실 겁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만능 천재입니다. 그림도 그리고 조각도 했다는 것은 같은 미술분야이니 그렇다쳐도, 각종 기계를 발명하는 것은 정말 보통 사람들로선 접근조차 힘든 영역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추사 김정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서예가이면서 당대의 미학자로 시대 미감의 기준을 세웠고, 비석들을 연구하는 금석학에도 대가였던 인물입니다. 비교적 현대의 인물에는 공병우 선생도 있겠죠. 최초의 안과의사였는데 한글 타자기를 발명하셨으니까요. 뛰어난 작사작곡가이자 연극연출가인 김민기씨도 빼놓지 말라구요?

공병우 박사가 발명한 공병우타자기 광고. 공병우 박사는 안과의사면서 발명왕이었다. 그가 만든 공병우 타자기는 가장 사용자 편의를 중시한 타자기로 평가받았다. 공병우 박사는 이 타자기말고도 최초의 점자 타자기와 중국어 주음부호 타자기도 개발했다.


서양의 만능스타를 더 꼽자면
장 콕토도 낄 듯합니다. 문학도 했지만 미술에도 뛰어들어 무대예술작품도 만들었고 스테인드글래스에 각종 보석 디자인도 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팔방미인을 들라면 단연 괴테를 꼽을 듯합니다. 괴테는 원래 법대를 나온 변호사였는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걸작을 써서 대문호가 됐고, 자연 연구에서도 권위자였으며 색채학과 광학에 조예가 깊어 이 분야에서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글쓰기 분야로 한정하자면 아이작 아시모프가 챔피언급 아닐까요? 

일반적으로는 위대한 과학소설 작가로 유명한 아시모프는 이 분야 저 분야 글도 많이 썼습니다. 과학저술가이니 당연히 천문학이나 생물학, 화학, 물리학 책을 쓴 것까지는 그렇다해도 해부학, 수학, 어원학, 지리학, 역사학책은 물론 유머책과 그리스 신화에 대한 책까지 무려 500여권을 썼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하는 방식인 ‘10진분류법’ 모든 항목에 저서가 포함된 유일한 작가로 불립니다.

미국사람들이라면 팔방미인으로 벤저민 프랭클린만한 사람도 없다고 할 것 같습니다. 실제 팔방미인 시합을 하면 챔피언이 될 법도 합니다. 온갖 것 잘하기로 가히 다빈치에 맞먹습니다.

100달러짜리 지폐인물인 벤자민 프랭클린. 17남매중 15째로 태어나 각고의 노력으로 자수성가해 미국이란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수많은 분야에 업적을 남겼지만 묘비에는 오로지 `인쇄인'이라고만 썼을만큼 소박했기에 전세계적으로 존경받는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노력과 자기관리로 인격의 완성을 추구했던 인물입니다. 신문 경영자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고, 이후 활발히 사회활동을 하면서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전신이었던 필라델피아 아카데미를 만들었습니다. 정치가이자 외교가이며, 동시에 수많은 발명품을 남긴 발명가입니다. 그가 미국을 넘어 인류에게 남긴 최고 선물은 그가 발명한 ‘피뢰침’입니다. 그가 만든 난로도 대히트를 쳤습니다. 수많은 미국 가정이 그가 만든 고성능 난로 ‘프랭클린 난로’ 덕분에 더욱 따듯하게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가 교훈과 기지넘치는 경구들을 모아 만든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은 역시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길잡이이자 벗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팔방미인은 서양보다는 동양권에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 문명권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지배계급이 직접 예술을 창작하는 역할을 맡아온 것이 한중일 동아시아 문화권이기 때문입니다. 지배계급(사대부)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것을 중요한 덕목이자 의무로 여긴 문화권은 동아시아 말고는 없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정치가가 곧 문인이요, 화가요, 서예가였습니다. 당연히 만능맨이 쏟아졌습니다. 앞서 거론한 추사 김정희가 대표적이죠. 중국만해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할만큼 만능이었던 당나라 시인 왕유가 있고, 이것저것 다 잘했던 소동파가 있습니다.

사대부가 사라진 근대 이후 만능예술가로는 동양예술의 4대 분야인 시, 서, 화는 물론 전각까지 달인이었언 우창쉐(오창석)이 있고, 목수로서 장인이자 전각가와 화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중국의 피카소’ 치바이스(제백석)이 있겠습니다.

화가이자 전각가, 그리고 목수인 치바이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예술가가 됐다. 새우 등 생활 주변의 소재를 해학과 기지 넘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목수 출신이니 당연히 목공예에도 대가였고 전각과 회화 모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자, 그러면 본론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앞서 제가 말한 이런 팔방미인들도 ‘영국 대표 팔방미인’에는 못미칠 거라고 주장할겁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오늘 소개할 ‘윌리엄 모리스’(1834~1896)입니다.

팔방미인 많은 문화예술계에서도 유례가 없을만큼 다방면에서 걸출한 족적을 남긴 윌리엄 모리스. 노동자와 생활을 위한 예술이란 신념으로 공예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굴곡진 가정생활로 평생 심한 마음고생을 했고, 그런 번뇌를 예술활동으로 잊고자 했다.


윌리엄 모리스는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온갖 것들에 통달했던 인물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는 그가 활동했던 분야에서 모두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는 점입니다. 많은 분야를 넘나들긴 했지만 성과가 아이디어 수준에 그쳤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넘어선다고 하겠습니다.

일단 모리스는 영국의 계관시인입니다. 시인으로서 최고 영예죠. 그래서 옥스포드대 시학 교수로 추대도 됐습니다. 본인은 거부했지만. 극작가와 수필가, 소설가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모리스는 건축가이자 공예가, 디자이너로 미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자였는데 온갖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회개혁가, 생태주의자, 환경보호운동가, 문화유산 보존운동가, 아나키스트, 유토피아주의자, 정치평론가, 교육사상가 가운데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있습니다.

환경과 문화보호에서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보호할만한 자연구역이나 문화재를 시민들이 기금을 모아 구입해 개발로 인한 파괴를 막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이 처음 나온 영국에서 주도적 인물이었습니다.
 
이쯤되면 보는 사람이 질립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의사는 “윌리엄 모리스였다는 것이 주된 원인으로 죽었다. 그는 평생 열사람 몫을 했다”고 말했다는군요.

모리스가 아내 제인 버든과 결혼해 신접살림을 차리며 지은 집 `레드 하우스'. 당대의 디자이너들과 예술가들이 장식한 이 집은 건축사와 디자인사에 주요작으로 남았다.


이 모리스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공예운동가, 디자이너입니다. 그는 평생 유토피아와도 같은 사회를 꿈꿨습니다. 그는 이상적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두 가지 핵심요소로서 `자유로운 노동'과 `예술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에게 노동은 가장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의미의 노동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뤄지는 창조적인 행위로서의 노동, 그리고 결코 고통이 되어서는 안되는 노동을 지향했습니다.

즐겁지 않은 노동은 과연 진정으로 쓸모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쓸모없는 노동의 결과 만들어진 제품들은 소비자까지 비인간적으로 만들어버린다고 모리스는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아래에서 노동은 그런 속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그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는 `예술'을 택했습니다. 예술은 모리스의 무기였습니다. 예술이란 궁극적으로 노동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리스는 인간의 노동이 예술화되면 소비생활과 지역생활도 예술화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는 더욱 예술적인 제품이나 건축물, 도시공간을 원하게 되고, 그러한 욕구가 생산자를 움직여 더욱 예술적인 제품과 건축물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생활을 통한 예술문화의 계승 과정이야말로 사회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당대의 예술가들인 ‘라파엘 전파’(라파엘로 이전의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므로 그 이전 시기 예술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19세기 영국의 예술가 그룹)들과 교류하면서 생활속 예술인 공예라는 분야를 개척했습니다. 19세기 산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생활속에 예술의 감각을 더하는 ‘공예’가 등장했고, 이 공예를 예술로 편입시킨 주인공 중 한 명이 윌리엄 모리스였습니다.
 
만드는 사람과 쓰는 사람에게 모두 행복한 예술, 민중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 모리스는 예술의 최고 경지에 오른 예술 중의 예술이 각종 장르가 융합하는 건축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예술의 모델을 중세 고딕 시절의 미학으로 생각했습니다.

 
일찌감치 디자인과 공예예술의 거장이 된 그가 평생의 과제로 삼은 소재는 ‘책’이었습니다. 그는 예술의 최고 경지가 책이며, 책의 최고 경지를 이룬 것이 그가 늘 높이 평가하는 중세의 책으로 봤습니다. 모리스는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활자체’로 여기고, 중세 글씨체를 모범으로 하는 새로운 글꼴과 중세식 책 만듦새를 따르며 책 자체가 예술작품이 되는 책을 추구합니다. 그가 이런 중세 미학의 부활을 꿈꾸며 세운 공예회사가 1890년, 그가 환갑을 바라보는 56살에 세운 ‘켐스콧 인쇄공방’입니다.

모리스가 세운 `켐스콧 인쇄공방'의 문양. 중세 고딕 미학을 진정한 예술로 믿었던 모리스는 중세책을 본뜬 책을 만들기 위해 이 공방을 세웠다.

켐스콧 공방은 그의 이런 이상에 따라 그가 숨지기 전까지 6년 동안 최고급 소재에 최고의 장인들의 솜씨를 동원해 모두 53책 66권의 예술작품성 책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켐스콧 책들 가운데에서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책은 <제프리 초서 작품집>입니다. 모리스가 디자인한 글꼴을 비롯해 당대의 화가였던 번 존스의 그림, 그리고 모리스가 극도로 까다롭게 고른 최고급 삼베 종이와 어린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책입니다. 영국인으로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초서를 사랑했던 모리스는 초서 작품집을 만드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여겨 나이 60살에 마침내 작업을 시작했고 1896년 2년만에 결국 책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네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초서 작품집>은 서양 장서가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 수집품으로, 아센덴 공방의 <돈키호테>와 더우즈 공방의 <성서>와 함께 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쇄본으로 꼽히며 책 값이 억대에 이른다고 합니다.

모리스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제프리 초서 작품집>. 모리스는 책의 장정부터 글꼴까지 모리스의 철학을 쏟아부었다. 수집가들 사이 최고의 인기 아이템으로 경매가가 억대를 호가하지만 한정판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 예술작품 수준으로 올라선 책들이 처음으로 국내에 선보입니다. 파주 헤이리에 있는 전시장 ‘윌리엄 모리스’(031-949-9305~6)에서 9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 열리는 ‘윌리엄 모리스, 책으로 펼치는 유토피아’란 전시횝니다.

<초서 작품집> 챕터별 머릿페이지.


이번 모리스 책 전시회는 바로 모리스의 켐스콧 공방이 펴낸 책 일체를 한자리에 선보입니다. 장서가로 소문난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10년에 걸쳐 수집한 모리스 컬렉션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시회입니다. 모리스의 열렬한 팬인 김 대표는 헤이리에 세운 전시장은 물론 전시장내 찻집 이름까지 모두 윌리엄 모리스로 지었습니다. 아담한 전시장에서는 모리스이 ‘예술품 책’들과 함께 모리스가 디자인한 각종 벽지 문양, 그리고 태피스트리도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자, 모리스를 만나보니 어떠신가요?

물론 모리스가 역사상 최강의 팔방미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열심히 했다는 점, 그 점만이라도 늘 본받고 싶어집니다. 재능보다도 노력으로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니까요. 같이 받은 시간, 모리스까지는 아니어도 아껴써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게 됩니다.

파주 헤이리 `윌리엄 모리스' 카페 모습. 모리스의 주요 작품들을 진열했고, 늘 검정과 빨강 두가지 색깔만 쓴 그의 책처럼 빨강과 검정 인테리어로 꾸몄다.

 

# 뱀다리 1

영국을 가장 사랑하는 나라는? 

제가 보기엔 ‘일본’입니다. 같은 섬나라로 세계를 제패한 영국을 늘 롤모델로 삼고 흠모합니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두 나라는 같이 팀을 짜서 심각한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영국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을 늘 동맹으로 이용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나라가 뒤집어 썼습니다.

비록 2차대전 때는 두 나라가 적국이 되었지만 일본의 영국 짝사랑은 여전합니다. 대중문화 작품들에는 그런 경향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 만화 <마스터 키튼>을 봅시다. 키튼은 영국사람과 일본사람의 혼혈입니다. 그는 영국이 자랑하는 특수부대 SAS에 몸담습니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은 영국식 생활을 이상으로 설정합니다. 홍차문화에 대한 선망은 만화 <홍차 왕자>에도 드러납니다.

이런 경향은 지금은 덜합니다만 일본의 개화기 때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일본은 영국 문물을 빨리 도입해 자기들을 일깨우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늘 영국의 문화인사들을 높이 평가해왔습니다.

이 영국 사람 윌리엄 모리스를 가장 높이 평가하고 사랑하는 나라도 일본입니다. 모리스가 쓴 소설 <에코토피아 소식>은 이미 1904년 일본어로 처음 번역되었고, 1929년 춘추사에서 펴낸 세계 대사상 전집에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간행된 지 불과 13년만에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30년 후에는 세계 대사상의 하나로 평가된 것입니다. 1908년 영국 유학을 통해 모리스 사상을 접했던 도미모토 겐키치와 겐키치의 영향을 받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일본 땅에 모리스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야나기 무네요시'군요. 그는 진정한 거인이었나봅니다) 일본에선 이미 모리스 마니아들이 상당해서 일찌감치 모리스 전시회가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리스 역시 일본 마니아였습니다.  모리스가 남긴 그의 집 켐스콧 매너에는 모리스가 모았던 일본풍 장식품들이 무척 많다고 합니다. 서양과 동양이 서로에게 매혹되던 시기 모리스 역시 일본문화에 반했던 것이죠. 모리스가 우리나라 백자를 봤으면 이마리 자기보다 더 빠져들지 않았을까요?


# 뱀다리 2

20세기 지성사에서 손꼽히는 저작인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남긴 에드워드 P 톰슨은 모리스 팬클럽 회장격인 사람으로, 모리스 연구서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 낭만가에서 혁명가로>에서 톰슨은 모리스를 노동자계급의 주체적인 계급형성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한 인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정말 톰슨틱한 평가군요. 톰슨은 모리스 사상에 빠져 공산당과 결별하고 모리스적 사회주의자, 즉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답니다.

 

# 뱀다리 3

보통 사람들과는 사고나 철학이 다른 분들이 예술가들이시다보니, 예술가들의 애정 이야기는 가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곤 합니다. 주로 예술적 영감을 주는 한 여성을 여러 남성이 동시에 흠모해 결국 1처 다부가 되는 경우가 있지요. 또는 자기에게 영감을 주는 친구의 부인을 유혹해 결혼하기도 하구요. 친구 부인을 꼬셔 결혼한 살바도르 달리, 역시 <레일라>를 부르며 가장 친한 친구 부인과 결혼해 친구의 가정을 박살낸 에릭 클랩톤을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이 모리스도 그런 희대의 연애사건의 주역입니다. 문제는 그가 친구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피해자였다는 점이죠. 빼앗아간 친구는 화가 로제티입니다. 그런데도 모리스는 바람 핀 아내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부인이 친구 로제티와 한달 동안 동거하자 모리스는 세 사람이 함께 살자고 먼저 제안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정말 가없는 사랑입니다.
 
모리스가 책에 빠져든 것도 이 삼각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를 빼앗아간 로제티는 아내를 여신으로 그려댑니다.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모리스의 그림 실력은 로제티엔 못미쳤습니다. 번뇌하던 모리스는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에 빠져들었고, 그게 바로 책 만들기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