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지고 놀기

문흥미 이후 최고 여성 성인만화가 탄생-앙꼬 2007/03/27

딸기21 2018. 6. 11. 10:36

90년대 중후반 순정만화판은 괜찮은 여성 만화가들이 여럿 나왔다. 이들 가운데 나예리나 이빈, 유시진 같은 작가들을 좋아했는데, 특히 이향우와 문흥미를 좋아했었다. 그림도 좋았고, 그 펜터치도 좋았고, 무엇보다 그 정서가 좋았다.

 

문흥미는 내게 처음에는 그냥 당시 만화를 그리던 여러 '순정만화가'들 중 한사람이었다. 그가 내게 특별한 작가가 된 것은 대표작인 <THIS>를 읽은 다음이었다. 전형적인 단편만화 모음집이었는데, 그 전형적인 점이 약점일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좋았다. 드라마게임 보듯 잔잔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삶의 단면들을 잘 잡아내고 있었다. 비슷비슷한 순정만화들 사이에서 모처럼 어른용 순정만화를 읽는 기쁨이 컸다.


 

문흥미씨가 <디스>를 냈던 90년대 중후반은 잠시 한국만화산업이 절정기를 맞았던 시절이었다. 순정만화만해도 <이슈> <나인> <화이트> 등 여러 만화잡지가 있어서 경쟁적으로 좋은 작가들을 발굴했고, 많은 작가들이 데뷔할 수 있었다. 천계영이란 새로운 스타도 나왔고, 이은혜나 원수연같은 기존 스타들도 여전히 건재했던 시절이었다. 그 속에서 두드러진 존재가 문흥미였다.


그러나 그 시절은 정말 잠깐이었다. 냄비처럼 일순간에 후끈 올랐던 만화 시장은 금세 식었다. 잡지들은 경쟁적으로! 폐간했고, 만화가들에겐 빙하기가 시작됐다. 아니 그 이후로 계속 빙하기니 차라리 지금이 정상이요 그 때가 이상 난동기라고 보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좌우지간 그 이후로 한국 만화는 참 힘든 모양이다. 잡지가 그렇게 적어진 것을 보면 좋은 작가들이 데뷔하기가 참 어려워졌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타까워하고는 한다.


문흥미 같은 작가들도 그 뒤로는 좀처럼 접하지 못했다. 최근 그가 KTX 여승무원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는 소식을 잠깐 접하고는 잠시 <디스>의 그 작가 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가 요즘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혼자 궁금해하기도 했다.

 

사실 문흥미 이후 순정만화판에서 어른들의 정서에 맞는, 어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잡아내는 작가는 드물었다. 비슷비슷한 순정만화들 사이에서 개성어린 그림,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만화를 보고 싶었다.

 

나는 종종 만화를 본다. 그것도 회사에서.  문화부 기자란 직업이 좋은 점 하나는 사무실에서 책상위에 떡하니 만화책을 펼쳐 놓고 읽어도 "일 열심히 한다"며 칭찬해주는 것이다. 가끔 읽을 만한 만화가 없을 때에는 어슬렁거리며 `만화책 헌팅'에 나서기도 한다. 마감을 마친 뒤, 내가 일하는 6층 <한겨레> 문화부에서 2층 아래에 있는 <씨네21>이 만드는 만화잡지 <팝툰> 사무실로 마실 나갔다. 좋은 만화 하나 빌려줄 것 없냐고 묻자 전재상 편집장이 만화책 한 권을 입에 침을 튀겨가며 추천했다. 그 책이 바로 <열아홉>이다.

 

퍼렁색 바탕에 여고생 그림을 그린 표지가 강인해보이는 책인데, 작가는 처음 들어본 `앙꼬'란 이였다. "최근 2년 사이 읽어본 성인 만화 가운데 최고 작품"이라고 전재상씨는 강조했다. 따듯하고 정감어린 만화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을 아는 터라 화끈 엽기를 추구하는 내 취향은 아니겠지만 괜찮겠다 싶어 빌려 들고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열아홉>의 주인공들은 소시민들, 또는 소외받는 사람들, 그리고 못사는 사람들, 좋은 학교 다니지 못하는 여고생들 같은 사람들이었다. 출판사에서는 `변두리 일상의 박물지'란 멋드러진 수식어를 달아놓았는데, 적확한 표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절로 문흥미의 <디스>가 떠올랐다. <열아홉>은 문흥미보다는 더 강하고 개성적인 그림체로 문흥미 보다 더 날카롭게 일상을 파고들고 있었다. 대신 문흥미만큼 어른스럽지는 않았다. 하긴, 작가는 아직 20대가 아닌가. 20대만의 감성과 매력이 넘쳤다. 

 

결론부터 말하면 추천자 전재상 편집장의 말처럼 "최근 2년새 본 최고의 어른 만화"는 내게 아니었다. 그러나 충분히 좋았고, 재미있었다. 스스로 범상치 않은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작가의 말을 몰랐어도 그의 청소년기가 왠지 파도가 좀 쳤을 듯하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책 날개에 있는 작가의 프로필이었다.


"1983년 경기도 성남에서 최양길씨의 셋째딸로 태어났으며....현재는 집 옆에 있는 아버지의 사무실을 빌려 그곳에서 주로 작업을 한다."


제법 많은 책과 만화책을 봤지만 아버지 이름을 밝히는 프로필은 처음이었는데 그 읽는 맛이 묘했다. 이 자기 소개만으로도 이 작가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앙꼬란 작가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는 모르겠다. 지금처럼 척박한 만화판 현실속에서 그가 상업작가로 대성하기를 예상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잡지들이 사라지고 단행본들이 점점 상업화하는 현실에서 이런 참신하고 진지한 작가들에겐 기회가 많이 가지 않는 탓이다. 데뷔 기회를 잡기조차 어렵다. 이 작가 역시 몇년 동안 여기저기 발표했던 조각들을 모아 이 책을 펴냈다.

 

<열아홉>은 제목처럼 내 멋대로 앙꼬란 작가가 `문흥미 이후 최고의 여성 어른만화가'가 될 것을 기대해보게 만드는 역작이다. 


그림은? 이경석의 <속주패왕전>을 처음 봤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문흥미보다는 훨씬 개성적이다. 앙꼬의 그림은 개성이 부족하고 비슷비슷한 캐릭터 유행을 따르는 요즘 순정만화가들의 특색없는 그림 속에서 모처럼 강하고 묵직한 개성파 여성 작가를 만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열아홉>은 간만에 만난 좋은 성장만화, 그리고 성인만화다. 앙꼬가 앞으로 더 훌륭한 어른만화를 선보이길 기대한다. 요즘 뜸한 문흥미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