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만만건축 9회] 5공화국의 초대형 개선문 프로젝트 사연은? 2009/03/24

딸기21 2018. 11. 25. 14:24

개선문 짓다가 나라가 망한 황제를 아시나요? 

 

카레라이스빛 개선문이랄까? 

거대한 문이 눈 앞에 버티고 서있다. 정말 큼직한 덩치다. 



 

인도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인디아게이트다.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가장 넓은 길인 대통령궁 앞길 끝에 이 거대한 문이 서 있다. 절로 떠오르는 파리의 개선문과 비교해보자.



 

개선문계의 간판스타, 통칭 파리 개선문, 정확히 에투알 개선문이다. 

1836년생이니 지은 지 170년 넘은 근대의 산물이다. 나폴레옹의 똥고집과 과시욕이 만들어낸 거대한 문이다.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문이다.

 

과연 높이는 얼마나 될까? 한번 가늠해보시라.

 

정답은,

 

49미터. 

그러니까 한 50미터쯤 된다고 보면 된다. 

 

저 개선문을 직접 봤을 때 개인적인 느낌은 ‘뭐 그냥 그렇군’이었다. 예상 이상으로 감동이 적은 건축물이었다.


우선 비현실적인 크기 자체가 감동적이지 않았다. 무조건 크게 짓자는 강박만 느껴진 탓이다. 그리고 모양도 그리 아름답다는 생각은 안들었다. 선전용 건축물의 한계다. 

물론 뜯어보면 멋진 구석은 가득하다. 문 몸체에 새긴 조각들은 그 포스가 대단하다. 제대로 보면 꽤 들여다볼 것이 많은데, 전체로서의 모양새는 그저 무난하다고 하겠다.

 

그러면, 파리 개선문와 저 인디아게이트 중에서 어떤 문이 더 높을까?

 

그래도 파리 개선문이 조금 더 높다. 인디아게이트의 키는 42미터. 7미터 작다.





인디아게이트는 모양이 파리 개선문에 견주면 상당히 단순해지면서 현대적이다. 1930년대에 만들어 그 사이 디자인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비록 웅장하고 멋질지 몰라도 저 문은 실은 무척 슬픈 문이다. 

 

저 문을 만든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죽은 인도 군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다. 인도 군인들이 왜 죽었겠는가? 식민지배를 한 영국을 돕다가 죽었다. 그 수가 무려 9만명.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끌려가 희생된 한국인들이 떠오르는 문이다.

그래서 저 문의 몸체에는 당시 희생당한 인도 병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그러니까 인디아게이트는 개선문이 아니라 추모의 문이다. 모양은 개선문과 같으나 전쟁의 승리보다는 전쟁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조형물인 것이다.

 

파리의 개선문과 델리의 인디아게이트가 보여주듯 문은 국가적 조형물로 애용된다. 도시의 최고 중심부, 광장에 주로 들어서곤 한다. 

이 개선문 또는 기념문 문화는 서양에서 그 역사가 굉장히 오래된 것이다. 동양문명과는 다른 서양의 문화, 건축적 특징이기도 하다. 서양의 오랜 기념문 역사에서 보면 파리 개선문과 인디아게이트는 거대한 기념문의 역사에서 거의 신생아 수준이다. 


시리아 팔미라의 문 유적.


이 기념문 문화가 가장 널리 자리잡았던 것은 로마시대로 추정된다. 로마제국은 곳곳에 개선문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다.



 

로마시대 개선문은 황제의 공적을 기리는 것들미 많다. 저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로마를 통일한 것을 기념해 312년에 만든 것이다. 그러니 1800살 먹은 문이다. 파리 개선문이 문 하나 짜리 개선문이라면 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문 3개짜리의 대표선수다.

저 문보다 더 오래된 로마시대 개선문으로는 티투스 황제 개선문이 있다.





로마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고대의 개선문들은 이후 잠잠하다가 이후 다시 부활한다. 유럽을 휘감은 민족주의 열풍속에서다. 제국들이 쪼개지면서 민족국가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포장하고 국민들을 민족국가의 기치 아래 모이도록 강조하기 위해 개선문들을 경쟁적으로 지었다. 저 파리 개선문이 그 대표라 하겠다. 

 

나폴레옹은 저 지독하게 큰 개선문을 만든 것에서 볼 수 있듯 개선문을 무척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에투알 개선문만 아니라 또다른 개선문도 만들었다. 파리의 카루젤 개선문이다.




이 카루젤 개선문은 그 모양이 앞서 소개한 로마시대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나 티투스 개선문과 거의 흡사하다. 고전의 리바이벌, 아니면 카피, 또는 오마주 쯤 되겠다. 저 문은 1808년이 지었다. 그러니까 저 개선문 먼저 짓고 보기 좋았던지 나폴레옹은 다시 에투알 개선문을 화끈하게 지은 것이다. 

 

이런 개선문들은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다.




브뤼셀에 있는 개선문이다. 옆의 날개처럼 건물이 이어졌을뿐 역시 고전주의 개선문의 전형적인 모양을 따르고 있다.

 

그러면 이 개선문은 어떤가? 



 

문 모양이야 뭐 다르게 하기가 어렵겠지만 그 꾸미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유럽은 유럽인데, 정작 유럽 문화권에선 비유럽으로 여겨지는 나라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와 축구 클럽 바르샤로 유명한 도시 바르셀로나,


그 바르셀로나에 있는 개선문이다. 역시 가우디의 도시다. 


이런 거대 조형물이 꼭 있을 법한 나라라면 역시 웅장한 것 짓기 좋아하기로 빠지지 않을 러시아를 꼽지 않을 수 없겠다. 당연히 모스크바에도 개선문이 있다. 



 

이 모스크바 개선문달고도 러시아에는 개선문이 많다. 바르셀로나 개선문처럼 그 나라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블라디보스톡 개선문을 보자.



 

이 블라디보스톡 개선문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란 양반이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지은 것이다. 보기만해도 러시아 건축임을 알 수있을 정도로 나라색이 강하다.

 

그런데 이 문을 지은 니콜라이2세는 ‘개선문 업계에선 꼭 기억해둬야 할’ 인물이다. 


나폴레옹이 개선문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 양반도 장난이 아닌 개선문 마니아였다.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했으니 개선문을 지으라고 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방문한 모든 도시에 똑같은 개선문을 지었다. 그래서 전세계에서 가장 길고 넓은 러시아의 동쪽 끝 블라디보스톡부터 서쪽 끝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이 양반 개선문이 있다.

하지만 이 양반은 정작 개선문 세울 일은 하지 않고 개선문만 세웠다. 결국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이 니콜라이 2세를 마지막으로 망하고 말았다. 

 

이 헬렐레한 황제의 개선문들은 노동자를 억압한 제정러시아의 상징으로 꼽혀 소련 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여기저기서 마구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러시아로 바뀌고 세상도 바뀌어 2003년 니콜라이2세 135주년(왜 이렇게 묘한 연도를 기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시 복원되기도 했다는 그런 이야기.

 

아, 정말 중요한 개선문을 빼먹을뻔 했다. 

파리 개선문 다음으로 유명한 문, 독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이다.




베를린에 있는 브란덴부르크문은 1788년 지었다. 그런데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고 베를린도 양쪽으로 쪼개졌을 때 이 문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경계가 됐다. 그래서 분단의 상징이었던 이 문은 통일 이후에는 통일의 상징으로 180도 바뀌었다.

 

이렇게 민족주의 국가 탄생과 함께 몰려왔던 개선문은 20세기 들어서도 각광 받으며 세계 주요도시에 지어졌다. 그 이유는 인디아게이트가 들어선 것과 같은 이유, 그러니까 이전에는 없었던 거대 전쟁인 세계대전이 벌어진 결과였다. 이 큰 전쟁에서 희생당한 자국 병사들의 용맹을 기리는 한편 그 희생을 추모하는 국가 조형물로 개선문들이 애용된 것이다.




얼핏 보면 파리 개선문과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이 문은 루마니아 부큐레슈티 개선문이다. 1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해 지은 기념문이다.

사진으로 보면 무지하게 웅장해서 파리 개선문 못지않아 보이는데, 실제 규모는 높이 27미터로 에투알 개선문보다는 훨씬 작은 편이다. 

 

그러면 현대의 개선문과 기념문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런 거대한 문들은 대부분 국가 기념 조형물들이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짓는 경우가 많고 그 모양도 심히 촌스럽거나 지나치게 크기만한 것들이기 쉽다. 



 

이런 거대 기념 건축에 빠지지 않는 북한의 간판 건물, 평양개선문이다. 그래도 평양의 다른 촌스런 건물들보다는 덜 심각한 편이라고 치자. 

 

북한과 남한의 공통점이 세계 최대, 동양 최대 이런 것들을 심하게 좋아하는 것이라고 앞서 말한바 있다. 저 평양개선문도 규모에 무지하게 집착한 건축물이다. 파리 개선문보다 더 크다. 높이가 60미터다. 가운데 아치 모양 문 높이만 27미터, 폭이 18미터다. 

김일성 칠순 생일에 맞춰 1982년 지었고, 화강암 재질이다. 우리나라 전통 석탑의 디자인 특성을 따왔다고 하는데, 판단은 각자에게 맡기겠다.

저 개선문은 기둥 양쪽에 ‘1925’, ‘1945’란 숫자를 대문짝 만하게 달아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1945는 조국 해방을 이룩한 1945년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러면 1925년은?

김일성이 조국 광복을 위해 만경대 고향을 떠났던 해라고 한다. 그것도 14살 나이에.

 

다른 현대적인 문으로는 여러가지들 있는데, 이슬람권의 문은 못봤으니 이 문도 하나 소개한다. 이라크의 바그다드에 있는 문이라고 한다. 조형성이 좋게 말해 화끈하다. 



 

바그다드의 문으로는 저 호떡 먹을 때 쓰는 종이집게 모양 문보다는 요 문이 더 유명하다고 한다. 규모가 훨씬 큰 문이다.



 

문 제목을 맞춰보시라. 

쉽다. <승리의 손>.

 

평가는 엇갈리겠으나 전공자들의 평가는 일치할 듯하다. 심히 촌스러운 사실주의적 표현주의적 국가주의적 조형물이라 평할 것같다.

 

그런데 저 문을 보고 이 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 이번에도 평양에 있는 문이다. 평양의 관문 통일거리에 있는 ‘3대헌장탑’이라고 한다. 1999년에 완공한 문처럼 생긴 탑인데 이라크 ‘승리의 손’ 문보다도 증상이 훨씬 심각하다. 실제로 본다면, 웃길 것 같다. 좀 잘 좀 짓지 원.


저 탑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니 조국통일 3대 헌장을 기념하는 것으로, 높이는 3대 헌장을 상징해 30미터이며 너비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상징해 66.5 미터로 했다고 한다. 

 

그럼 우리는 어떨까?

우리나라는 개선문이 없다. 다행이다. 

왜 다행이냐고? 전쟁해서 국민들 죽어나간 것을 기념하는 문은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개선문 세울 일이 없는 것이 국민들에겐 좋은 법이다.



물론 우리도 많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개선문이 아니라 추모기념문이 없는 것은,

우리나라는 기념조형물을 문이 아니라 탑으로 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거대한 기념문이 전혀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한테도 있다. 



 

다행히 전쟁기념문이 아니라 이름부터 ‘평화의 문’이다. 평화와 가장 먼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서 좀 어처구니없는 문이긴 하다.

 

저 문을 만든 이유는 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탑’을 좋아한다. 다른 나라도 문 또는 탑을 좋아하긴 마찬가지다. 올림픽을 한 나라들은 대부분 탑을 지었다. 그걸  우리도 따라하기로 했다. 그래서 당시 정권은 외국 올림픽탑들을 살폈다.


1900년 파리 올림픽. 에펠탑 지었다.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앞에 기념문 지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탑을 세웠다.

1972년 뮌헨과 1976년 몬트리올, 연달아 텔레비전중계탑을 도시 랜드마크로 지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의 차례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이란 양대 행사를 앞두고 상징조형물건립소위원회를 구성했다. 86 조형물은 조각가 김세중(광화문 이순신 동상의 작가), 88 조형물은 건축가 김중업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이러저러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불화도 많아 다 백지화되고, 88 올림픽 기념문으로 통합 추진되었다. 그 작가로 김중업이 뽑힌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중업은 고심해서 저 문을 디자인해서 계획안을 냈다.

그런데 위원회는 난리가 났다. 높이가 24미터 밖에 안된다는 거다. 너무 작다고 윗분들이 열받았다는 것이다.

김중업은 당연히 입이 튀어나온다. 규모가 국보 1호 남대문보다도 3배나 되는 크기인데 작다고 트집이니 할 말이 없지만 당시는 나라에서 ‘까라면 까야 하던’ 때였다. 결국 다시 설계를 한다. 이번에는 문 높이를 91미터로 늘렸다. 개선문보다도 5배나 되는 규모이자 타지마할보다도 큰 덩치로 키웠다.

그런데 위원회는 이번에도 다시 난리를 친다. 너무 크다는 것이다. 다시 줄이라고 졸라댔다. 김중업은 세번째 설계를 한다. 결국 높이 32미터, 날개폭 45미터로 줄어들었다. 이게 바로 지금 저 문의 사이즈다. 

 

북한의 저 유치찬란한 문과 우리의 저 황당한 문은 건축에 있어서 서양식 ‘문의 문화’에 익숙치 않은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서양식 전통이 우리에겐 낯설어 생긴 시행착오성 건물이라 하겠다.

 

그러면 서양에선 왜 저런 문들이 발달했을까?  

우선 문이라는 형태가 기념 조형물로 만들기 좋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기념비 건물로 과시하기에 적합한 디자인인 것이다. 

그리고 문은 그 형태상 여라가지 조각 등 장식으로 꾸미기도 좋다. 면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은 기념비의 최고 인기 디자인으로 사랑받아 왔다.

여기에 서양문화의 특수성이 더해졌다고 볼 수 있다. 서양은 행렬문화에 익숙하다. 전쟁 등에서 이기면 개선 행진을 했고, 이런 행렬에는 문이 있어야 제격일 수밖에 없다. 지배자는 개선한 군대가 문 아래를 통과하는 국가적 퍼포먼스를 기획해 자기 치적을 과시하려 했고, 이를 위해 개선문을 즐겨 지었다. 이런 전통이 서양 건축의 특징으로 남은 것이다.


반면 우리는 이런 식의 기념 조형물을 세우지는 않는다. 거대한 탑을 짓기는 해도 종교적 목적이 많았다. 국왕을 기리거나 업적을 기념하는 것은 소박하게 기념비를 만드는 정도로 했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와서 저런 건축물들을 통해 처음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좀 잘 지었으면 좋은데 그 디자인이나 건물을 짓는 과정은 아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어찌됐든, 저런 기념문들은 지금껏 지어졌고 앞으로도 지어질 것이다. 저럼 문들은 국가적 사업으로 짓는 역사적 조형물이기에 한 시대의 역사적 순간을 상징하게 되고, 세월이 지나면 관광자원으로 외국인들이 찾는 명소가 된다. 


역사와 문화를 담는 거대한 문들은 한 시대의 상징이자 증언자다. 우리는 그런 문을 보며 살아간다. 거대한 새로운 문은 안지어도 좋다. 어차피 우리에게 개선문 문화는 없었다. 숭례문이나 태워먹지 말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