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탐험하기

주먹 센 고장 벌교에서 꼭 봐야할 것들 2008/11/24

딸기21 2018. 9. 14. 15:21

벌교는 ‘주먹자랑, 돈자랑 하지 말라’는 고장으로 유명합니다.


이제 벌교는 ‘태백산맥의 고장’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21일 벌교에 태백산맥 문학관이 들어서면서 명실상부한 태백산맥의 무대로 모습을 갖췄습니다. 


태백산맥 문학관 개관을 맞아 벌교를 다녀왔습니다. 벌교에는 아직 소설 속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래도 관심이 건축이어서 벌교의 주요 건축물 중심으로 쉬엄쉬엄 돌아다녀봤습니다. 


역시 벌교에서 가장 먼저 둘러볼 곳은 새로 생긴 태백산맥 문학관이라 하겠습니다. 벌교를 굽어보는 제석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현대식 건물입니다. 




건축가 김원씨가 설계한 태백산맥 기념관은 멀리서 보면 건물 몸통 부분이 가려 마치 탑이 두개 서있는 것 같습니다. 지형을 이용해 건물의 기념비적인 이미지를 강조한 디자인입니다. 정문쪽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통일을 위한 염원으로 정문을 북향으로 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사진은 역광이 되어 모양을 살피기에는 좋지 않군요. 소설 <태백산맥>과 작가 조정래씨와 관련된 것들을 전시해놓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벽화는 길이가 81미터나 되는 규모로 유명합니다.




1층 전시장 모습입니다. 창 밖으로 돌을 모자이크식으로 붙여 만든 벽화가 보입니다.


건물 4층은 전망대입니다. 벌교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태백산맥 문학관의 옆에는 소설속 중요한 등장인물인 소화가 살던 집, 그리고 현부잣집이 있습니다. 소화의 집은 원래는 없던 것을 보성군에서 지난해 새로 만든 것입니다.




소화의 집은 현부잣집 바로 옆입니다. 소설에서 소화는 무당입니다. <태백산맥> 1권 시작하는 부분에서 현부자가 제사지내는 집과 별장을 새로 지으면서 월녀와 소화가 살 작은 집을 마련해준 것으로 나옵니다. 세칸짜리 작은 집인데, 새로 지어 가난한 맛이 전혀 나지 않고, 또 신을 모시는 방들도 너무 요즘에 만든 티가 많이 나는군요.  


소화네 집과 현부잣집 사이는 제석산으로 올라가는 등산길이 나 있습니다. 역시 이름을 태백산맥 등산로라고 붙이고 큼직한 돌기념비까지 세웠습니다.




건축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새로 지은 웅장한 문학관이나 소화의 집 보다는 독특한 한옥인 현부잣집이 더 흥미로우실 겁니다. 현부잣집은 대문 모양부터 일반 한옥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대문이 솟을대문처럼 보이는데 훨씬 가운데가 높게 튀어오른 것이 자세히 보면 아예 2층구조입니다. 저런 양식은 전통한옥에선 찾아볼 수 없지요. 일본식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전통 한옥과 일본가옥 형식이 절충이된 독특한 혼합형 혼혈 건물입니다. 한옥을 기본으로 하면서 일본식 양식을 여기저기 덧붙였습니다.




우선 마당 정원 가운데에 화단을 조성하고 나무를 심은 것도 우리 전통 마당 조경양식이 아닙니다. 한옥은 마당 전체를 비워놓습니다. 결혼식, 곡물 타작 등 행사와 노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렇게 중간 정원에 나무와 꽃을 섬처럼 심는 것은 일본식 정원 방식입니다.


건물 입구에 돌기둥을 세우고 튀어나오게 건축한 것도 아주 색다른 방식입니다. 역시 우리 한옥에는 없는 것을 차용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현부잣집은 소설 <태백산맥> 첫부분의 무대입니다. 조직의 밀명으로 활동거점을 찾아나선 정하섭이 새끼무당 소화를 찾아가 이곳을 은신처로 삼습니다. 이후 소화와 정하섭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슬슬 언덕 아래로 내려가 벌교 읍내를 구경할 차례입니다. 부용교(=소화다리)쪽으로 내려가면 중간에 오른쪽 산 중턱에 어린이집으로 쓰고 있는 교회가 보입니다.




저 교회는 소설에서 ‘돌교회’로 나왔던 회정리교회로,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입니다. 1930년대 지은 교회인데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듯 교회 문이 ‘여자용’과 ‘남자용’ 양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교회를 돌아보고 다시 가던 길로 내려가면 이제 부용교 바로 앞입니다. 부용교를 바라보는 벌교 최고층 아파트 상가에 벌교에서 가장 유명한 꼬막식당이 있습니다. 그 이름부터 ‘외서댁 꼬막나라’입니다. 소설속 등장인물 이름을 따온 식당에서 벌교가 명실상부한 태백산맥의 고장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식당들 간반 한번 요란 뻑쩍지근합니다. 한국적 문화로 보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벌교의 상징이랄 수 있는 소화다리, 부용교 입니다.




소화다리의 원래 이름은 부용교입니다. 1931년에 만든 콘크리트다리로 이제는 많이 낡았습니다. 차가 다닐 수 있게 옆에 다리를 하나 더 놓아 지금 보시는 쪽은 새로 지은 다리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태백산맥 등장인물 소화에서 다리 이름을 따온 것 같지만, 저 다리를 만들 때 일본 천황 연호가 쇼와, 그러니까 우리 발음으로 소화여서 소화다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지켜봐온 유서깊은 다리입니다.


저 앞 하천은 갯벌과 이어져 바닷물이 들어옵니다. 강둑 북쪽으로는 갈대밭입니다. 저 갈대길을 따라 찾아간 곳은 벌교의 문화재인 벌교 홍교입니다. 벌교에서는 횡갯다리라고도 하는데, 저 길의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하얀 솜덩어리를 단 듯 풍성한 갈대가 보기 좋게 이어져 한가롭게 거닐기 좋은 길입니다.




갈대길을 따라 무지개다리를 향해 가다보면 건너편에 커다란 돌건물이 보입니다. 보성이 낳은 유명한 음악가 채동선을 기리는 채동선음악당입니다.




채동선(1901~1953)은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인데 독일로 건너가 음악을 배웠습니다. 가곡 <고향>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남긴 사람입니다. 저 채동선 음악당과 조정래 문학관이 벌교의 양대 문화예술 기념관이라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벌교 출신 인물을 기리려면 목숨을 독립운동에 바친 나철의 기념관부터 지어야할 것 같습니다만.


계속 걸어다가보면 돌다리가 보입니다. 벌교의 상징인 홍교입니다. <태백산맥> 1권에서 김범우가 이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나옵니다. 


벌교라는 이름의 뜻을 아시나요?


저는 벌교의 벌자가 너른 벌판을 뜻하는 것으로 멋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뗏목다리(벌교:筏橋)였습니다.


벌교는 우리나라 땅이름 가운데에서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뗏목다리(벌교)라는 보통명사가 고유명사인 땅이름이 된 거의 유일한 사례입니다. 다리에서 고장 이름이 나온 점도 재미납니다.


저 돌다리가 벌교란 이름을 낳은 뗏목다리의 후손입니다. 1728년 지은 뗏목다리가 있었던 것을 선암사 초안선사가 보시해서 돌다리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돌다리는 의미 못잖게 건축사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돌다립니다. 보물 제304 호입니다. 현존하는 아치형 돌다리 가운데 가장 큰 것입니다.


우리 나라 곳곳에는 아름다운 아치형 돌다리들이 있습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는 만년교가 있고, 저 벌교 옆동네인 순천 선암사에는 승선교가 있습니다.


창녕군 영산 만년교. 보물 564호. 소박하고 아름다운 돌다리다. 직접 가보면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무척 아름답다.


그런데 저 벌교 돌다리는 뭐가 다르나구요?


다른 돌다리들은 모두 아치가 하나 짜리지만 저 벌교 홍교는 아치가 3개짜리입니다. 지금은 그닥 감동스럽지 않지만 당시만해도 보기 드문 대형 아치교였던 것입니다. 만년교와 비교해보시면 그 웅장함(!)을 실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디 아치가 세개냐, 일곱개 아니냐 싶으실텐데 자세히 보시면 저 다리는 왼쪽 오래된 돌다리에 오른쪽 새 돌다리를 이어붙인 모양입니다.


저 돌 아치를 무지개(홍=虹)라고 하지요. 그런데 잘 보면 왼쪽 오래된 오리지날 돌다리는 저 돌들이 자체적으로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구조입니다. 반면 오른쪽 새 돌다리는 겉모양만 돌다리입니다. 콘크리트 다리에 돌을 붙였습니다. 돌 자체가 구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어놓은 모양도 좀 ‘깹니다’. 어차피 강폭이 넓어져 다리를 증축해야 했다면 제대로 모양을 비슷하게 내던지, 아니면 아예 옛다리는 옛스러움 그대로 놔두고 현대적이고 모던한 다리로 대비를 시켰으면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제대로 촌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좌우지간 다리를 한번 건너시죠. 먼저 새로 지은 다리부분입니다.




그리고 옛다리 입니다.




우리나라 옛 무지개 다리들은 처음 건너는 분들은 좀 무서우실 수도 있습니다. 난간이 전혀 없거든요. 게다가 생각보다 아치가 봉긋합니다. 앞서 소개한 창녕의 영산 만년교도 건너보면 경사가 무지하게 높습니다. 그래서 아치 돌다리들은 요즘 다리와는 걷는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어디갔다가 무지개다리를 만나시면 꼭 한번씩 건너보시길.


다시 저 잘생긴 무지개 다리와 깨는 연결다리 한컷 더 보시죠.




그런데 맨 왼쪽 아치 다리 아래부분을 보면 뭔가 튀어나와 달려있는 것이 보입니다. 뭘까요?




우리나라 절 앞 다리들을 보면 다리 아래에 저렇게 돌조각을 달아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을 타고 들어오는 악귀를 막는 수호신이지요. 저 무지개다리를 지키는 돌조각도 그런 용도인지는 미처 확인은 못했습니다.


요즘 지자체들이 관광지 화장실 묘하게 짓기 시합이 붙은 모양인데 무지개다리 앞 화장실도 좀 독특했습니다.




돌다리를 돌아본 뒤 오늘의 또다른 주요 목적지인 벌교의 명물 ‘남도여관’으로 향했습니다.


남도여관은 <태백산맥>에서 토벌대가 본부로 썼던 건물로 나옵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건축문화재입니다.


벌교역 부근 뒷길로 벌교초등학교쪽으로 가다보면 어딘가 좀 달라보이는 2층 건물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이 집입니다.




저 건물이 바로 남도여관입니다. 검은색 나무와 함석지붕으로 지은 전형적 일본식 건물입니다. 당시에는 무지하게 흔한 건물일뿐이었는데 이젠 다 사라져버린 탓에 문화재가 되었습니다. 높은 건물이 없었을 당시 벌교에선 저정도면 무척 큰 건물이었겠지요.


옆쪽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남도여관이 있는 골목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모여살던 ‘혼마치(본정통)’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인들의 중심거리는 어디나 ‘혼마치’였습니다. 서울에서 일본인들이 모여살던 곳도 지금의 명동과 충무로 일대인 ‘혼마치’였습니다. <장군의 아들>에서 종로의 김두한이 맞서던 일본 야쿠자 두목 하야시가 바로 이 혼마치의 대장이었습니다. 당시 전국 어디에나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쥐어짜던 혼마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벌교는 사실 볼거리가 많지 않은 동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순천만 갈대나 보성 녹차를 보기위해 남도에 들른다면, 낙안읍성과 함께 어딘가를 또 가보고 싶으시다면 한번 찾아가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벌교라는 이름을 낳은 저 다리도 건너보고, <태백산맥>의 주인공들이 고뇌하고 싸우고 보듬었던 무대의 정취를 조금이라도 느껴보시면 또다른 나들이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