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지고 놀기

올해 최고 만화, 고르는게 고문이네 2008/07/26

딸기21 2018. 9. 10. 17:57

최근 부천만화상을 심사하러 다녀왔습니다. 이럭저럭 만화와 오랜 인연을 맺어오다보니 가끔 만화에 점수 매기기를 하게 되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만화 심사라는 것이 괴로운 일입니다.

이론적으로 심사는 좋은 것을 골라내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심사하는 처지로선 좋은 만화를 안타깝지만 눈 질끈 감고 밀어내야 하는 읍참마속의 과정입니다. 이번 부천만화상 심사도 수많은 작품들을 놓고 도대체 뭘 탈락시켜야 할지 괴로운 고민을 실컷 해야 했습니다.


지난 1년 사이 나온 최고 만화를 뽑아라


부천만화상은 대한민국만화대상과 함께 가장 큰 양대 만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만화대상은 대통령상, 장관상 등으로 수상자를 정하고, 대상에 1천만원의 상금을 줍니다. 반면 부천만화상은 대상이 500만원이고, 부문도 대상, 일반부문, 청소년부문, 어린이부문, 기획부문 등으로 나누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런데 상금은 두번째여도 부천만화상 대상은 또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대상 수상작가에게 이듬해 부천만화축제에서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를 열어주는 점입니다. 좀처럼 전시회를 열기 어려운 만화가들에겐 귀중한 배려가 되는 특전입니다. 올해 부천만화축제에선 지난해 대상을 받은 순정만화가 김동화 선생의 전시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올해 부천만화상은 2007년 6월부터 2008년 5월 사이 출판된 만화와 인터넷 만화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 기준에 맞춰 모두 77종 184권이 응모를 했습니다.


이 만화들을 모두 읽어야 한냐구요? 당연하지요. 그래서 심사 앞두고 밤마다 만화를 읽느라 고생했습니다. 다행히 출품작의 3분의 2 이상이 이미 읽었던 것들이었습니다만, 그래도 다시 한번 읽어야했지요.


올해 심사위원은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인 김동화 선생, 청강문화산업대 모해규 교수, 염진아 한국만화가협회 사무국장, 그리고 제가 맡았습니다.


만화상 심사의 주안점은 물론 작품성이 우선이고 책으로서의 완성도, 만화계에 미친 영향, 상업적 파급력까지 감안합니다. 그렇게 해서 뽑은 올해의 수상 결과는 이렇습니다. 


대상                  이희재, <아이코 악동이>

어린이만화상      이은홍,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내 친구 똥퍼>

청소년만화상      김규삼, <입시명문 사립 정글고등학교>

일반만화상         윤태호, <이끼>

카툰상               지현곤, <JI HYUN GON>

기획상               최호철, <을지로 순환선> 


오늘은 부천만화상 수상작들이 왜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만화들, 추천할만한 만화들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되살아나 반가운 악동이, 자기 길 확실히 가는 이은홍 


대상이 이희재 선생의 <아이코 악동이>이 된 것은 어찌보면 무척 안전한 선택이고, 어찌보면 의아합니다. 




한국 리얼리즘 만화의 대표자이자 만화계 중진인 이희재 선생이란 점에서는 당연하고 안전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반면 ‘악동이’란 오래된 캐릭터를 아시는 분들께는 뜻밖일 수도 있습니다. 언제적 악동인데 다시 나온 만화냐 싶으실 겁니다.


그런데, 이번 악동이는 옛날의 그 악동이책을 다시 낸 것이 아닙니다. 캐릭터는 이희재 선생의 그 악동이입니다만 이번에 새롭게 창작해 다시 그린 만화입니다. 오래된 청동거울 속에서 나온 아이코와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꼬마 악동이가 펼치는 동화같은 모험이야기입니다. 이희재 선생의 정감어린 그림은 물론 여전하지요. 한국을 대표하는 중진이 새롭게 창작한 우수한 어린이 만화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대상으로 꼽혔습니다. 




다음은 어린이 부문이었습니다.


어린이 만화책들은 최근 몇년 새 무척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저 악동이도 대상으로 빠져나갔지만 어린이 만화책이었지만 만약 어린이 부문에 남아 수상을 겨뤘다면 무척 고민을 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어린이 만화 수상작으로 뽑힌 이은홍씨의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내 친구 똥퍼>는 상을 받고도 남을 만한 만화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았는데 상을 받게 되어 저도 기뻤습니다. 




이 만화는 똥 치워주는 아저씨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포근하고 정겨운 만화입니다. 원래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이 쓴 한문 단편소설 <예덕선생전>을 이은홍씨가 다시 만화로 만든 것입니다. 고전 콘텐츠를 오늘에 훌륭하게 아이들이 보기 좋게 되살린 점, 빼어난 그림 솜씨, 탁월한 재미 등으로 좋은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내용을 전하면서도 고리타분하지 않고 말투가 재미있는 점도 훌륭합니다. 예전 <술꾼> 등에서 보여줬던 정겨운 그림체가 이제 거의 완숙 단계에 접어든 느낌입니다. 어린 자녀가 있는 학부모들께 권하고픈 책입니다. 


그런데 이 똥퍼에게 상을 주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워낙 강력한 경쟁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책으로 나올 신예 만화가 하민석씨의 <열아홉 고개 옛 이야기 만화>가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펼쳤습니다만 아쉽게도 상을 타지는 못했습니다. 




이 만화는 보리출판사에서 펴내는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한 만화인데, 만화이면서 빼어난 일러스트 동화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옛날이야기를 만화로 깔끔하게, 그리고 현대적이면서도 옛그림 맛을 잘 살린 그린 그림보는 맛이 좋습니다. 비록 상은 못탔지만 앞으로 작품과 성장세가 정말 기대되는 작가라고 하겠습니다. 


이 밖에도 홍승우씨의 <빅뱅 스쿨>, 이충호씨의 <내 친구 코봇> 역시 훌륭한 후보였으나 수상은 못했습니다. 이 두 만화는 허접하고 비슷한 몰아내기식 학습만화들과 달리 그림의 정성과 만듦새가 돋보이는 좋은 만화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 이런 학교가 있겠어?-만화보다 실제 학교들이 더하네 


청소년 만화부문은 출품작은 적었습니다만 뽑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출품작들이 숫자는 적어도 하나하나 모두 재미있고 알찬 만화들이었습니다. 면면을 보면, 배희원씨의 <수요전>, 가온비&쥬더의 <불명의 레지스>, 김인호의 <지랄발광>, 김정혁의 <버스정류장>,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 최호철의 <태일이> 등이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제 개인적으로는 모두 좋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만화계에서 그 의미를 나름 인정받은 작품들이었습니다.



상큼한 농구만화 <지랄발광>. 농구를 해 본 사람들은 공감하게 되는 동작 묘사가 일품. 파란닷컴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단행본으로도 나왔다. 



청소년 만화부문 수상작은 앞서 말씀 드린대로 <입시 명문 사립 정글고등학교>였습니다. 최근 나왔던 만화 가운데 재미면에서 단연 앞서는 만화였고, 또 가장 화제가 되고 인기 높은 만화라고 하겠습니다.


이 만화는 마치 북한처럼 학교를 독재적으로 지배하면서 학생들을 획일화하는 사학재단들의 어이없는 작태를 유쾌하게 비꼬는 만화입니다. 학교 만화이면서 폭력 싸움 장면도 없고, 하이틴 로맨스같은 간지러운 연애도 없지만 허무하면서도 새로운 감각의 개그가 일품입니다. 이 유쾌한 만화에 청소년 만화부문상을 주게 된 것 자체가 유쾌했습니다. 




만화니까 그렇지,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정말 요즘 세상에도 이런 학교가 있나 싶은 두 학교가 실제로 존재하더군요. 어느 학교가 더 개판인지 막하막하였습니다.


먼저 ㅈ고. 기사를 보시지요.


다음 ㅊ고. 정말 대단한 학교입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얼마나 이상한지를 보여주고자 작정한 학교 같습니다. 기사를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저 만화속 정글고는 오히려 애교스런 수준입니다. 교육감 선거가 중요한 까닭입니다. 관심 좀 갖고 투표합시다. 우리 곁에는 정글고가 아직도 존재합니다.


다시 만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겨레21> 애독자들이나 최규석씨의 팬들은 <대한민국 원주민>이 수상 못한 것이 아쉬우실 겁니다. 이 <대한민국 원주민>은 정말 상을 받았어도 충분한 만화입니다. 그리고 이 만화는 꼭 책으로 봐야 하는 만화입니다. 주간지에 연재될 때에는 좀 심심한 느낌이었는데 묶여서 한권으로 보니 그 밀도가 배는 강해진 것 같았습니다. 좋은 만화이니 한번쯤 관심가져 주시길. 




저 개인적으로는 빼어난 스포츠만화 <지랄발광>과 잔잔한 수채화같은 서정성이 돋보이는 성장만화 <버스정류장>이 수상하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쉬웠던 만화는 <태일이>였습니다. 




저 <태일이>는 노동자의 숭고한 권리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며 자기 몸을 스스로 불사른 전태일 열사를 그린 만화입니다. 그래서 뻔하고 예상되는 이야기의 교훈적이고 도식적인 만화일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번 읽어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교수 만화가 최호철의 아름다운 그림, 그리고 서정적인 스토리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성장동화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고 아름답습니다. 오히려 전태일 만화란 점 때문에 오해받고 손해보는 만화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상을 받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만 <정글고>에게 밀렸습니다.


여기에는 또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최호철 작가의 또다른 만화책 <을지로 순환선>과 같이 출품된 것도 요인이었습니다. 아직 연재중인 <태일이> 대신 최호철이란 작가를 제대로 조명한 작품집 <을지로 순환선>에게 기획상이 돌아간 것입니다. 한 작가가 두 상을 받기란 불가능하니 이번에는 <태일이> 차례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태일이>는 최근 나온 가장 아름다운 만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칙칙하고 교조적일 것이란 선입견을 버리고 한번 읽어보시면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될 겁니다. 


윤태호, <이끼>가 계속 나오기를 바라며


역시 일반 부문은 가장 출품작이 많았습니다. 치열한 경합이 벌어진 것은 당연했습니다.

수상작은 역시 윤태호의 <이끼>. 1권만 나왔음에도 “역시 윤태호”라는 평가를 받았던 노작입니다. 영화를 보는 것같은 장면 연출, 흡입력 강한 이야기로 모처럼 윤작가의 역량을 그대로 담아낸 빼어난 스릴러 만화입니다. 그동안 윤태호씨가 연재에 좇겨 그림을 날림으로 그렸던 <주유천하> 등 때문에 못마땅했는데 이번에는 예전 <야후>를 보는 것처럼 힘이 넘쳐 반갑기 그지없었던 작품입니다. 




<이끼>는 상복이 많은 만화입니다. 문제는 이 만화가 연재되던 인터넷 만화잡지가 문을 닫았다는 점입니다. 빨리 새 연재 매체를 찾아 계속 이어져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요즘 만화산업은 너무 위축되어 지켜보는 제가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최후까지 남았다가 <이끼> 때문에 아쉽게 상을 놓친 경쟁작은 독특하고 강력한 김홍모씨의 만화 <항쟁군>이었습니다. 




항쟁군은 ‘수묵 에스에프’ 만화입니다. 일본이 아직 우리를 지배한다는 가정 하에 독립 항쟁에 뛰어든 열혈 청춘들의 모험기입니다. 붓질 특유의 느낌이 주는 그림 보는 재미가 대단합니다. 독특함을 넘는 재미가 있는 우수한 만화였지만 아깝게 <이끼>에 밀렸습니다. 이 만화가 계속 인기를 누리기를 기대합니다. 


항쟁군의 이미지. 붓으로 그려 한국화를 보는 것 같다. 펜화에선 볼 수없는 붓 그림의 힘을 만끽할 수 있다.



강풀의 사랑 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상을 받을만한 작품임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앞서 강풀이 이 만화상에서 큰 상을 받아 아쉽게도 제쳐졌습니다. 전세훈씨의 관상만화 <신의 가면>도 상은 못받았어도 재미만큼은 보장되는 만화라 하겠습니다.


‘이보다 더 독특한 만화는 없다’는 듯한 개성파 개그만화 이경석씨의 <전원교향곡>도 수상은 실패.  만화계 전문가들은 다들 좋아하는 토마의 만화 <속좁은 여학생>도. 최강 개그만화인 메가쇼킹 고필헌씨의 <탐구생활>과 신세대 도자기 만화 <도자기>도 상 대신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가장 출품작이 적었던 카툰 부분에선 두 작품이 팽팽하게 붙었습니다. 지현곤씨의 카툰집 <지현곤>, 그리고 박근용씨의 <레인 북>. 누구 손을 들어줘야 할지 정말 어려웠습니다.


두 작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만화가로선 배고픈 장르인 카툰에 매진하는 점, 그리고 두 작가 모두 몸이 불편한 작가라는 점. 하지만 그림 세계는 정반대입니다. 지현곤씨가 문제 많은 현실을 비판하는 풍자 카툰을 그리는 반면 박근용씨의 카툰은 동화처럼 아름답습니다. 결론은?


토론끝에 오랫동안 카툰에 천착해온 지현곤씨가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지현곤씨의 카툰 작품 하나. 손으로 일일이 그리기 때문에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오랜 시일이 필요하다. 가히 집념의 카투니스트라 할 수 있다.



<T.L.T>, 내겐 올해 최고의 만화 가운데 하나! 


마지막 기획부문은 <태일이> 대신 최호철 작가의 <을지로 순환선>에게 돌아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기획상은 책을 기획한 출판사의 역량을 보는 상입니다. 그래서 상금도 이 책을 기획해 펴낸 만화전문 출판사인 거북이북스에게 갑니다. 




최호철 작가와 <을지로 순환선>은 제 블로그에 오신 분들께는 낯설지 않을 겁니다. 우리 시대의 풍속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최 작가의 독특한 매력이 넘치는 그림이야기책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 글을 보시면 도움이 될 듯하네요. 


이번 심사에서 제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것은 <T.L.T>가 수상을 못한 점이었습니다. <T.L.T>는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기업만화입니다. 그러나 귀여운 그림이 아니라 사실적이면서도 한국 만화에선 보기 드물게 서구 만화의 느낌을 잘 살린 그림 그 자체만으로도 볼 맛이 나는 만화입니다. 이 만화는 특히 기획면에서도 우수한 작품입니다. 경영을 전공한 스토리 작가와 그림 실력 좋은 만화가가 잘 결합해 탄탄한 준비로 만들어낸 우수한 만화라 하겠습니다.


본격적인 기업만화로 모처럼 나온 수작이란 점도 반갑습니다. 기업만화는 박봉성, 허영만 이후 상당히 오래 주목작이 없었는데 이 작품으로 다시 명맥을 잇는 느낌입니다. 허영만의 <퇴역전선>이나 <미스터Q>가 떠올랐을 정도입니다.




한 컷 정도만으로는 이 만화의 매력을 제대로 알려드리기 힘든데, 다행히 네이버에서 얼마든지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한번들 보시길 권합니다. 


좌우지간 이렇게 수많은 만화들을 고르느라 힘들지만 즐거웠던 심사였습니다.


이번 포스트에서 언급한 만화들은 제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또 누구나 좋아하실만한 것들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수상작 여부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재미면에선 수상못한 작품들이 더 뛰어난 경우도 많았습니다. 


최근 나온 괜찮은 만화들을 접하고 싶으실 분들을 위해 좀 길지만 이번 후보작들 중심으로 주저리 주저리 좀 길게 소개해봤습니다.


한동안 블로그에 뜸했는데, 앞으로 좋은 만화 소식으로 자주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